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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 읽기] 꽃봉오리가 활짝 터지는 순간, 내 삶에도 '포이에시스'가...

입력
2017.03.1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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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정을 아름답게 만들기위해

인간은 현재로부터 탈출을 시도

열망하던 미래로 나아가려면

새 봄 꽃처럼 기지개를 켜보자

백작약. 카틴카 맷슨 2014년작.
백작약. 카틴카 맷슨 2014년작.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자신이 하는 일,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는 그것을 추구하는 개인의 삶의 이유이며 그의 삶을 지탱하는 공식이자 버팀목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eㆍ1905~1980)는 삶에 의미는 있을 수 없고, 굳이 있다면 그 의미를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허무하게 말한다. 인간에게 살만한 이유를 선사하는 ‘의미’란 결과가 아니라 의미를 찾는 과정과 여정이다. 결과는 그런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아름다운 삶, 인간의 오랜 갈망

의미를 찾는 인간은 그 과정을 근사(近似)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이 근사를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아름다움은 객체가 주체에 대한, 외부가 내부에 대한, 남이 나에 대한 과학적이거나 수적인 평가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주체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한 내적인 분투이다. 아름다움에는 자신이 열망하는 삶에 대한 일관된 노력과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화롭고 평화롭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숭고한 노력을 히브리어로 ‘토브’(tob)라고 불렀다. ‘토브’라는 단어는 지상에 존재할 것 같지만 항상 저 넘어 천상에 존재하는 최선(最善)이기 때문에 묘하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경전인 ‘창세기’에서 이 단어를 소개한다. 신이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 좋다.” 만일 우리가 높은 산 정상에 기어이 올라가, 마침내 발아래 펼쳐진 산과 바다를 보면서 저절로 내뱉는 말이다. “아! 좋다.” 이 말에는 도덕적 평가가 개입할 틈이 없다. ‘창세기 1장’을 기록한 기원전 6세기 무명의 시인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생물과 무생물의 원래 모습을 신의 입을 빌어 ‘아! 좋다’라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그는 인간을 특별하게 표현한다. ‘아! 너무 좋다’라고 표현하였다. 인간에겐 신적인 완벽함을 근사하려는 독특한 열망이 존재한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대상이 내재적으로 가지는 매력을 ‘칼론’(kalon)이란 그리스 단어로 표현한다. ‘칼론’은 인간이 간절히 원하는 어떤 이상적인 것으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을 동요시키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어 ‘칼론’은 히브리어 ‘토브’와는 달리 의무적이며 도덕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칼론’은 인간이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옳은 것’이다.

예술, 숭고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

우리는 이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예술’이라고 부른다. 예술은 이 각박하고 순간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 구원이다. 인간은 자연을 심오하게 관찰하고 자신의 내면을 묵상하면서, 그 안에 숨어있는 신비를 발견하고 소스라친다.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시간의 순환아래서 생명이 변화무쌍하게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한다. 생명은 봄에 화사하게 꽃피우고, 여름에 인내하고, 가을에 자신의 운명적인 시간을 감지하여 열매를 맺고, 영원을 기약하기 위해 씨앗으로 변신하고 겨울에 온전히 죽지만, 어김없이 다시 봄에 부활한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영원한 회기에 감탄한다.

‘예술’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아트’(art)는 정말 오래된 단어다. 미국 고고학자 마리아 짐부타스(Marija Gimbutasㆍ1921~1994)에 의하면 서양이란 정체성은 기원전 4,000년경 발칸반도에서 유목-농경생활을 병행하던 일련의 사람들에게서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들을 ‘인도-유럽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우주와 생명의 아름답고 지적인 순환을 ‘르타’(rta)라고 말했다. 그들은 기원전 2,000년경 세 갈래로 흩어져 각각 인도, 이란 그리고 터키 들어가 서양의 근원이 되었다.

그 중, 한 갈래가 인도로 들어가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고도의 발달된 문명과 마주친다. 인도-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에 인도에 있었던 도시문명을 ‘원-인도 문명’이라고 부른다. 원-인도 문명의 핵심은 후대 힌두전통을 통해 알려진 ‘요가’(Yoga)다. ‘요가’란 천상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정신과 몸에 엮어 습득시키려는 영적인 운동이다. ‘요가’는 인도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인 ‘아리안’족이 전쟁에 투입된 야생말을 훈련시키는 방법이었다. 자기 맘대로 행동하려는 말을 혹독한 훈련을 시켜 명마로 변모시킨다. 그런 말을 훈련시키는 가시적인 물건이 바로 ‘멍에’다. 멍에는 말, 소 등 목에 얹어 그 가축을 제어하는 도구다. 이 도구를 영어로 ‘요크’(yoke)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요가’와 같은 어근에서 유래했다.

고대 인도인은 가축의 ‘멍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짐승 상태에서 신적인 경지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을 ‘요가’라고 말했다. 요가의 목적은 오래된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진입하는 엑스터시의 경험이다. 무아상태로 가기 위한 방법이 바로 ‘르타’다. 산스크리트어인 ‘르타’는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훌륭하고 적절하게 연결된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르타’가 사회에 최적화된 것을 ‘다르마’(dharma) 즉 6‘법’(法)이며, 개인에게 최적화된 것을 ‘카르마’(karma) 즉 ‘업’(業)이라고 불렀다. ‘르타’는 실천하는 사람을 ‘아르야’(arya) 즉 ‘아리안’인으로 불렀다. ‘아리안’은 20세기 초 나치가 도용하고 악용한 개념이지만, 원래 숭고함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르타’에서 ‘예술’로 번역되는 라틴어 ‘아르스’(ars)와 영어 ‘아트’(art)가 탄생하였다.

훌륭함과 깨달음을 향한 포이에시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예술을 고대 그리스어로 ‘테크네’(techne)라고 불렀다. ‘테크네’는 우주와 자연의 원칙을 관찰하고 그것을 엮어 가시적인 물건을 만드는 행위다. 우리는 ‘테크네’를 흔히 ‘기술’로 번역하지만 좀더 심층적인 의미는 ‘훌륭한 솜씨’다. 우리는 훌륭한 솜씨를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음식을 통해 경험하였다. 내가 요리하면 맛이 없는데, 어머니가 요리하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첨가되어 신기한 맛이 등장한다.

이러한 맛을 중국 철학자 노자의 말을 빌리자면 ‘현묘’(玄妙)다. ‘솜씨’는 분석할 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한자 ‘현’(玄)이 그런 의미다. 이 한자는 원래 누에고치가 실을 뽑는 광경을 잘 볼 수 없다, 실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눈으로 도무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의미다. ‘테크네’라는 말의 어원도 원래 ‘엮다’라는 뜻이다. ‘기술’이란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본질적인 어떤 것들을 연결시켜 작동하게 하는 원리’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크세노폰(Xenophonㆍ기원전 430~355)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적은 책 ‘오이노미쿠스’라는 책에서 ‘솜씨’를 집안일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집안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가 ‘앎’(에피스테메)고 다른 하나가 ‘솜씨’(테크네)다. 소크라테스는 이 대화에서 ‘솜씨’의 예로 하프 연주, 군대 장군의 통솔력, 배를 잘 모는 항해술, 요리, 의술, 정원 가꾸기, 철공, 목공 등을 든다. 솜씨는 기존의 원재료들을 적절하게 배열하여 자신만의 특별한 예술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솜씨를 ‘테크네’와 달리 ‘포이에시스’(poiesis)라 한다. 우리는 흔히 ‘포이에시스’를 ‘시학’ 혹은 ‘시작’으로 번역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그리스 비극에 대한 책이름이 바로 ‘포이에시스’다. ‘포이에시스’,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플라톤의 저작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불멸과 영원을 획득하기 위해 ‘포이에시스’를 동원한다고 말한다. ‘포이에시스’가 창작하려고 하는 대상은 ‘아름다움’이다.

시간은 우주의 주인이다. 시간은 모든 만물을 태어남과 죽음, 신선함과 썩음, 따뜻함과 차가움, 밝음과 어둠이란 순환의 소용돌이 속에 빠뜨린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이 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세 가지 ‘포이에시스’를 시도한다. 성행위를 통한 자연스런 포이에시스, 영웅적인 명성을 찬양하기 위한 도시문명의 인위적인 포이에시스, 그리고 훌륭함과 깨달음을 얻기 위한 영혼의 포이에시스.

누에고치가 나비로 날아가는 그 순간, 포이에시스

인간은 항상 완벽한 아름다움을 염원하여 자신의 현재로부터 탈출하려고 시작하였다. 그런 탈출이 바로 ‘포이에시스’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ㆍ1889~1976)는 ‘포이에시스’를 겨울 내내 웅크려 있다가 봄바람, 햇살, 이슬비, 그리고 땅의 기운을 받아 봉우리를 터뜨리는 순간의 기운으로 설명하였다.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가 생명탄생의 원초적인 의지로 한 순간에 나비로 승화하는 생명의 약동이기도 하다. 버리고 싶은 과거에서 열망하는 새로운 지금과 미래로 전이하는 엑스터시의 순간이다. 내 삶의 포이에시스는 무엇인가? 나는 오래된 과거를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가? 나는 의미가 있고 훌륭한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가? 겨울 내내 묵묵히 봄을 기다려온 백작약처럼, 기지개를 켜고 싶다.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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