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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뿌리깊은 대의 민주주의… EU의 전제적 통치를 거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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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뿌리깊은 대의 민주주의… EU의 전제적 통치를 거부하다

입력
2016.06.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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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대륙과 다른 정체성

17세기 국왕을 반역죄로 처형

의회민주주의를 태동시키고

근대화 주도하며 역사에 자부심

투표 없이 임명된 EU 집행위가

상점의 바나나 크기까지 결정하는

무소불위 통치에 반감 극대화

영국 국론 분열과 EU의 고뇌

영국 1973년 EEC 가입 때도 갈등

1980년대 후 유럽회의론 강해지며

‘단일 유럽’이 국론분열 주원인으로

EU에게는 새로운 기회일 수도

비대한 관료제 손보고 규제 완화

팽창 일변도 멈추고 자성 필요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파운드화와 유로화가 급락하고 세계 금융?외환 시장이 요동을 치고 있으며 세계 경제가 극도의 침체에 빠져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영국 재무부가 국민투표 전에 내놓은 전망도 만약 탈퇴할 경우에 영국 경제는 대단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들은 다수결로 탈퇴를 결정했다. 그들이 탈퇴가 가져올 경제적 불안정을 모르고 그랬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탈퇴를 지지하는 측이나 잔류를 지지하는 측 모두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해왔고, 경제적 전망이 낙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영국인들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EU로부터 나가기를 원한 것일까? 그 원인은 장기적인 것과 단기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장기적인 역사적 요인과 무엇보다 EU의 비대한 관료제와 독선적 운영이 야기한 반감이라는 단기적 요인이 함께 작동한 결과다. 현재 영국의 EU 탈퇴에 대한 국내 논의가 EU내 분담금 문제, 이민 노동에 대한 불만, 난민 등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영국과 유럽대륙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잘 모르는 단견일 뿐이다.

‘영국은 유럽에 위치하고 있지만 유럽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영국은 유럽 대륙과는 다른 정체성을 견지해왔다. 영국은 오늘날 전 세계가 채택하고 있는 근대적 제도를 제일 먼저 발전시킨 나라다. 무엇보다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근대 과학을 들 수 있다. 17세기부터 영국 국민이 국왕을 반역죄로 처형하면서 그 권력을 제한하고 의회민주주의를 키우는 동안 대륙의 유럽인들은 전제정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영국은 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세계 경제를 이끌었으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린 최대 규모의 제국을 건립하고 운영했다. 모든 면에서 영국은 서양의 근대화를 주도했고 그 때문에 자국 역사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선구적으로 개척하고 발전시킨 제도를 다른 유럽 국가들은 뒤늦게 베끼고 따라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멸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존재하는 제일 좋은 것은 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국인들은 유럽 대륙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영국의 뿌리 깊은 반(反) EU 정서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적 문제점으로 EU 탈퇴냐 잔류냐의 논의에서 가장 크게 이슈화된 것은 주권의 문제, 즉 EU 집행부에 대한 불신이다. 물론 선동가들은 이민과 난민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인 불만사항으로 지목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영국인들이 EU라는 거대한 초국가적 조직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퇴운동을 주도한 나이젤 패러지 영국독립당 당수가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 ‘오늘은 영국의 독립일’이라고 선언한 데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태동한 나라다. 따라서 영국 국민들은 자신을 통치하고 명령을 내릴 사람은 자신이 투표로 선출하여 권리를 위임하고 권위를 인정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EU의 정책을 결정하는 집행위원회(Commission)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 아니라 각국 정부가 임명한 사람들로 주로 고위 관리 출신이다. 유럽의회가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선거를 거치지도 않은 ‘비민주적’ EU 집행위원회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EU에 속한 28개국 국민들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크게는 인권 문제로부터 작게는 시장에서 구입하는 바나나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기질 상 특히 자유와 자율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간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자신이 선출하지도 않은 EU 관료들이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것에 대해 더욱 더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EU 집행위원회가 위치한 ‘브뤼셀’은 요즘 영국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오죽하면 현 정부의 법무장관조차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나섰겠나. 영국의회가 통과시키는 법안의 60%가 영국의회의 발의가 아니라 EU 집행부가 명령하거나 요구한 것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국민투표 후 영국 사회와 정치권은 대혼란에 빠져 들었다. 캐머런 총리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1년여 밖에 되지 않는 젊고 활기찬 정치지도자지만 스스로 둔 자충수 때문에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보수당만이 아니라 노동당도 큰 변화가 예고돼 있다. 어찌 보면 보수당보다 노동당이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당론이 분열되었던 보수당은 반쪽이나마 목표를 달성해냈지만, 잔류를 당론으로 정했던 노동당은 철저히 패배한 셈이다. 코빈 당수의 사퇴를 요구하는 노동당 내 압력이 거세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런 내홍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비록 이번처럼 대규모는 아니지만 유럽을 둘러싼 비슷한 성격의 갈등이 과거에도 있었다. 영국은 1973년에 EU의 전신인 EEC(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했다. 그때에도 가입에 대한 회의론이 강했는데, ‘유럽 회의론’이라고 불린 이 정서는 1980-90년대에 더욱 강해졌다. 1980년대부터 EEC는 그동안의 실적을 과신하고 팽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단일통화를 구상하고 궁극적으로는 시장의 통일만이 아니라 정치적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전망을 내세웠던 것이다. 당시 영국총리인 마거릿 대처는 단일 시장에는 동의했지만 단일통화는 거부했고 유럽이 거대한 정치통합체로 나아간다는 구상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대처는 단일통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실제 2008년의 금융위기와 요즘의 그리스 사태에서 보듯 그 전망은 사실로 드러났다. 결국 영국은 각국 통화를 묶어주던 유럽통화정책에서 탈퇴했고 단일통화인 유로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파운드화를 고수했다. 그렇지만 친유럽 성향의 보수당 의원들은 대처 총리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1990년 이후 유럽 문제는 영국의 국론을 분열시킨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이제 영국은 우파, 좌파라는 개념 대신 탈퇴파와 잔류파로 재편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잔류를 지지한 48%의 영국인들이 재투표를 요구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론도 등장했다.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지만 국익에 반대되는 ‘우중’의 결정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한동안 양측의 감정 대립이 계속될 것이다. 특히 EU 이전의 세상을 기억하고 있는 노년층과, EU 밖에서의 영국을 상상하지 못하는 젊은이들 간의 세대 갈등이 심각해졌다.

영국의 탈퇴는 EU에게 고뇌를 안겨주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영국이 EU 내에서 집행부 결정에 반대하고 제동을 가하는 등 영국 덕분에 EU가 조금은 ‘덜 나빠졌다’는 평을 들었다. 이제 그 요소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EU는 모든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비대한 관료제와 각종 규제를 완화시켜야 할 것이다. 난민 문제와 터키의 EU 가입 문제도 정치적 이상의 차원이 아니라 평범한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제2, 제3의 영국이 속속 나타날 것이다.

이번 사건은 ‘큰 정부’가 반드시 좋은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준 좋은 예로 남을 것이다. 팽창 일변도로 달려오던 EU는 잠시 멈추어 서서 그동안의 경로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EU는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절대적 필요성에 직면해있다. 어떤 조직이든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이 정체성을 공유해야 한다. EU를 구성하는 27개국 국민들을 묶어주는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너무나 커져버린 EU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영국 경제는 세계 5위 규모다. 탈퇴파는 영국의 경제력이 EU 밖에서도 얼마든지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영국 경제가 어렵겠지만 장기적으로는 EU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더욱 활기차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견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은 앞으로 2-3년간 경제적 불안이 심화될 것으로 예측한다. 가장 큰 우려는 영국의 탈퇴가 전 세계 민족주의를 부활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국민전선을 위시한 각국의 극우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영국의 탈퇴를 지지해온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 사태를 막기까지 아직 몇 개월이 남아있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다. 유럽은 지금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최대의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 감정을 억제하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침착하고 현명하게 사태를 해결해 나아가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세계가 그들을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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