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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이제는 쉴 때다

입력
2016.07.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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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마고우. 사전에나 나오는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이사와 전학을 다녔기에 어릴 적 친구가 없다. 대신 내게는 마흔이 넘어서 동네 맥줏집 ‘오두막’에서 사귄 술친구가 몇 있다. 설마 맥주만으로 친구 관계가 계속되겠는가. 아이들 교육 문제, 동네 문제, 그리고 정치 문제를 두고 이런저런 토론도 하고 또 학교 운영위원으로 함께 참여하기도 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하면서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되어 버렸다.

그 사이에 우리의 나이는 쉰에 가까워졌고 ‘오두막’은 문을 닫았다. 우리는 길 건너편의 ‘주문진막회’로 아지트를 옮겼다. 새 부대를 마련했으면 새 술을 담아야 하는 법. 우리의 주제는 동네 문제와 아이들 문제에서 조국통일과 세계평화라는 거대담론으로 성장해야 했으나, 오히려 소박하게 먹을거리로 바뀌었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식문화 개선 같은 게 아니라 내가 먹고살 문제를 집요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업기술을 배웠고 춘천까지 가서 시험을 봐 ‘유기농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리고 석유를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농사를 짓겠다는 커다란 포부를 안고 이름도 어마어마한 ‘고양도시생태농업연구회’라는 조합을 만들었다. 적어도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마련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우리가 생각한 생태농업이란 석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석유로 만드는 농약, 비료, 비닐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 친화적으로, 또 석유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트랙터 대신 우리 몸의 근력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술자리에서 내디딘 첫걸음은 창대했으나 밭에서 내디딘 둘째 걸음은 참으로 미미했다. 아, 우리의 근육은 참으로 약했고 땅은 감당하기 힘들게 컸다. 온 종일 밭을 갈아봐야 티가 안 났다. 밭은 넓고 할 일은 많았다. 금방 깨달았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농부들이 트랙터를 사용하고 비닐을 씌우고 농약과 비료를 뿌려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우리는 이내 포기하고 석유를 사용하고 말았다.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은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광합성이다. 광합성이란 식물 세포 속에 있는 엽록체가 이산화탄소와 물을 이용해 포도당을 만들면서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꿔 놓는 과정이다. 이때 동물의 생존에 필요한 산소가 부산물로 발생한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생화학을 전공한 대학원 시절까지 광합성에 대해서는 무수히 배웠고 시험도 여러 번 치렀다. 그런데 농사짓기 전까지의 광합성은 그냥 몇 페이지의 종이 위에 그려져 있는 화학식이었을 뿐이다.

내가 광합성에 대해 놀란 것은 바로 속도다. 4월 초에 감자를 심으면 하지(6월 21일께) 무렵이면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다. 새끼손가락만 한 가지가 팔뚝만 하게 자라는 데는 불과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아침에 상추를 뜯었어도 햇볕만 좋으면 저녁에 또 뜯을 수 있다. 초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고스란히 식물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밭은 눈으로 직접 광합성을 목격할 수 있는 현장이다.

우리가 감자와 가지를 먹는 까닭은 녹말로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녹말 분자의 화학결합 속에 감추어진 태양에너지를 이용해서 생존하기 위해서다. 결국 우리는 햇빛을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가 없으면 식물도 없고 그러면 우리도 없다. 아, 고마운 햇빛이여, 그대 있으매 내가 있도다.

그런데 농사지으면서 더 놀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햇빛이 너무 세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6월 말 감자를 수확한 땅은 보통 광복절 즈음해서 김장용 배추와 무를 심을 때까지 거의 한 달 반 이상 놀린다. 왜 그럴까. 거의 취미 삼아 농사짓는 우리뿐만 아니라 부지런한 농부님들도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게으름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뿌리가 빨아올린 물이 식물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는 증산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잎에서 물을 증발시키면서 그 힘으로 뿌리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증산작용은 식물의 생존에 아주 중요하다. 물이 증발하면서 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체온을 조절할 수 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식물은 물을 최대한 증발시킨다. 하지만 태양을 이길 수는 없는 법. 결국 이파리가 노랗게 죽고 만다. 큰 나무들도 가지를 축 늘어뜨린다. 한여름에 자라는 곡식이라고는 물 위에서 자라는 벼를 비롯해서 몇 가지 안 된다. 그렇다. 뜨거운 여름에는 식물도 쉬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식물이 이럴진대 사람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농부도 쉬어야 한다. 밭농사를 쉴 때 학교도 방학한다. 방학은 학원에서 집중 교육을 받을 때가 아니라 쉬고 놀 때다. 한여름이 부지런하기로는 둘째갈 일이 없는 농부님들도 쉬는 때라면, 이때는 모든 사람이 쉬어야 하는 때일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쉬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유급휴가 일수가 너무 적다. 1년에 직장에서 부여받는 유급휴가 일수는 평균 13일로 전 세계 직장인 평균 24일에 한참 못 미친다. 프랑스처럼 34일을 원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평균은 돼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유급휴가를 다 쓰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 역시 한국이 61%로 가장 높다. 여름휴가를 가는 직장인들도 대개는 2, 3일 기껏해야 4, 5일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지 말고 적극적으로 쉴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창의성은 심심할 때 나온다. 창조경제를 모토로 시작한 지 벌써 3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창조경제가 뭔지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충분히 쉬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좀 쉬자. 특히 지금처럼 너무 더울 땐 쉬자. 요즘 제철을 만난 생물은 짝짓기에 안달이 난 매미뿐이다. 식물도 쉬는 데 우리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햇볕이 바람을 달군다. 쉬자.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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