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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석학칼럼] 글로벌 질서의 재탐색

입력
2017.07.0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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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십 년간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체제는 간신히 지탱돼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국 우선주의’ 또는 보다 실질적으론 ‘미국 고립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150일이 지나는 동안 미국의 전통적인 안보 균형자 역할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으뜸 가는 위상, 그리고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은 훼손됐다. 대신 다른 국가, 또는 비정부조직이 부상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은 그동안의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어떤 영향을 줄까.

다극(多極)체제의 등장이 포괄적이고 호혜적인 글로벌 시스템과 반드시 마찰을 빚는다고 볼 필요는 없다. 중국 같은 새로운 강국은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다. EU 역시 다시금 굳건해지면서 국제사회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국제관계 이론에 따르면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개방성과 질서를 특징으로 하며, 국제적 다자기구 성립의 기반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같은 원리는 나중에 세계무역기구(WTO)로 발전하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기반이 됐다. 냉전은 서구, 특히 미국과 영국의 지정학적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세계적 확장에 큰 걸림돌이 됐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에 확고한 헤게모니를 부여했고, 서방이 추구해온 국제질서 확장의 활로를 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더 빨리, 더 넓게 확장되지는 못했다.

오늘날 세계는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다. 2001년 ‘9ㆍ11 테러’는 많은 국가를 미국 주위에 결집시켰지만, 역설적으로 뜻밖의 세력에 의해 분화가 초래되는 더 근본적인 추세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이후 15년 동안 더욱 강해졌다. 국가들의 분화는 경제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조차도 선진국들에서 형성된 통념과 달리 세계적이지 않았다. 2009년 글로벌 GDP가 위축됐을 때조차도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과 인도는 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요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흩트리는 나라들은 그 질서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바로 그 나라들이다. 영국의 EU 탈퇴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는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같은 세계화의 부작용에 따라 증폭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좌절감을 반영한다. 이런 좌절감이 배타적인 국가주의의 부활을 초래했다. 일각에선 배타적 국가주의의 확산에 따라 이젠 강대국들 간의 경쟁이 다시 국제질서의 축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측이 종종 경쟁과 대립 관계를 빚을 국가들로 꼽는 게 바로 미국과 중국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점치는 건 지나친 기우다. 중국의 급작스러운 부상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 적잖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부 예상과 달리 중국은 기존 국제질서의 수정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중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미국이 탈퇴하려는 파리기후협약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의 역사적 연설을 통해 자신을 세계화의 확고한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시 주석은 “각국은 다른 나라의 피해를 전제로 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중국 당국은 중국이 글로벌 경제체제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혜를 입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따라서 굳이 기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뒤흔들어 중국의 체제 존립과 직결된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모험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는 오히려 중국과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 간의 통상관계를 밀접히 함으로써 ‘소프트파워’를 축적하고자 하는 전략적 선택을 보여 준다.

중국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기반에 공개적인 의구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지난달 30개 이상의 국가 및 국제기구 지도자가 참가한 베이징 ‘일대일로(BRI) 포럼’에서는 주목할 만한 코뮤니케가 채택되기도 했다. 그건 평화 정의 민주주의 법치 인권 성평등 등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자는 내용이었다.

코뮤니케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거나, 중국의 신중상주의적 경향 또는 중국의 비자유주의적인 국내 법제 등을 무시하는 건 실수일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을 서구적 가치와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만을 신봉하는 교조적 사회로 보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런 지나친 단순화는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점치거나, 영국이 EU에 남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오류 못지않은 중국에 대한 오류를 낳을 것이다.

불확실성과 부조화의 시대에서 EU는 국제질서의 주도자가 될 만한 여건을 확보하고 있다. 프랑스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승리는 여전히 가장 매력적이고 유연한 국제관계의 패러다임인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에 힘이 될 것이다.

EU의 단합은 시름시름 앓고 있는 국제 다자기구에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노력만 하면 신흥국가들을 진정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는 것까지도 아직 늦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런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비에르 솔라나 전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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