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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터널의 삶, 우리의 삶

입력
2018.05.18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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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출판사 제공
보림출판사 제공

햇살이 좋아도 봄꽃이 만발해도 미세먼지 등쌀에 시달리는 신세라 공기 맑은 날이면 황송한 기분에 발길 닿는 대로 어디든 걷고 본다. 요즘 들어 광화문 갈 일이 잦았는데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을 지나 무심코 성곽 길에 접어들면 이내 사직터널 꼭대기다. 건물들 위로 권율 장군 집터의 은행나무가 쑤욱 고개를 내민다. 그 앞엔 아흔 살이 훌쩍 넘은 붉은 벽돌집 딜쿠샤가 있다. 3∙1 운동을 해외에 처음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집이다. 은행나무 밑에 잠시 앉았다가 터널 옆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온다. 자동차들이 터널로 밀려들고 밀려나온다. 들숨 날숨 같다. 터널이 자동차들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터널 위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하다. 제법 큰 고개를 넘었다.

어릴 땐 차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마다 눈을 감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터널 속 어둠, 음울하게 웅웅대는 터널 속 소음이 두려웠다. 거대한 괴물의 뱃속이라 상상하기도 했다. 아직도 터널을 지날 때면 슬그머니 긴장된다.

터널에는 태생적으로 자연 훼손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오로지 사람 편하자고 멀쩡한 산을 뚫었으니, 안전 사고도 드물지 않으니 바라보는 눈초리가 고울 리 없다. 하지만 터널이 무슨 죄랴, 다 사람이 한 일인 걸.

이미나의 그림책 ‘터널의 날들’은 터널의 사계절을 그렸다.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 나는 태어났어요.” 터널이 말한다. 갓 개통된 터널로 차들이 들고 난다. 버스 탄 아이들은 터널 덕에 귀갓길이 빨라졌다며 재잘댄다. 운전석에 앉은 이들은 운전하느라 여념이 없고, 조수석과 뒷좌석에 앉은 이들은 창 밖으로 무심한 눈길을 던진다. 크고 작은 승용차와 어느 집 이삿짐 차와 사과 상자 빼곡한 트럭이, 갈 길 바쁜 오토바이와 버스가 터널 속을 달린다. 터널은 궁금하다. “모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터널의 날들

이미나 지음

보림출판사 발행∙38쪽∙1만5,000원

가로로 훌쩍 긴 판형, 펼치면 63㎝에 달하는 묵직한 화면이 압도적이다. 작가는 광각 렌즈로 보듯 공간을 넓게 포착하여 터널 안팎의 공간을 흥미롭게 살렸다. 과감한 구도, 과장된 원근감, 거친 듯 대범한 붓질로 빚어낸 화면은 역동적이고 박진감 넘친다. 앞다퉈 질주하는 차들과 욕심껏 쌓아 올린 각양각색 짐, 어둠을 몰아내는 조명과 웅웅 돌아가는 환기 팬, 바람에 부푼 옷깃, 흩날리는 나뭇잎, 터널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잇자국 선명한 사과… 뿌연 먼지에 뒤덮인 고단하고 분주한 우리 일상이 생동감 넘치게, 활기차고 아름답게 살아난다.

터널 입구 나무들에 연둣빛 새 잎이 돋는다. 꽃이 핀다. 풀씨가 나풀나풀 날아든다. 터널 속으로 차들이 밀려든다. 오늘도 어제처럼 바삐 오간다. 모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무엇 때문에 이리도 분주하고 격렬할까.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터널이 묻는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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