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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 식탁] 잘 익은 모과 한 알에 우정을 실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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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 식탁] 잘 익은 모과 한 알에 우정을 실어 보냅니다

입력
2017.10.25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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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과자와 모과잼. 네모난 모과잼(아래)은 버터, 치즈를 빵에 발라 먹듯 하몽에 곁들여 먹는다. 소설가 천운영 제공
막대과자와 모과잼. 네모난 모과잼(아래)은 버터, 치즈를 빵에 발라 먹듯 하몽에 곁들여 먹는다. 소설가 천운영 제공

“모과를 나한테 주기에 구슬을 건네주었지. 답례가 아니라 내내 친하잔 뜻으로.”

시경에 나오는 ‘모과’라는 시다. 지난 봄 김인환 선생의 시경 강의에서 이 시를 접한 후, 나는 모과를 우정의 메신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믿어버렸다. 왜 하필 모과였나, 그리고 왜 구슬이었나. 그 값어치를 가늠해 보답이나 답례를 넘어선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이 나무에서 떨어진 모과 하나를 주워 건네주고, 가지고 놀던 작은 구슬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주는 장면을 상상했더랬다. 멋대로의 해석이면 어떤가. 한없이 푸근해지는 장면인데.

가을은 참 그렇다. 누군가에게 모과 하나 보내고 싶은 계절. 잘 익은 홍시 하나 은행 한 줌 같은 것을 슬며시 건네주고 싶은 계절. 그것으로 기별을 넣고 안부를 묻고 싶어지는 계절. 실제로 나는 가을이면 대봉 감을 오랜 벗들에게 보내곤 한다. 1년쯤 연락을 하지 못한 벗이기도 하고, 감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벗이기도 하다. 어른 주먹 만큼 큰 걸로, 가장 빛깔이 고운 걸로 골라서. 아버지가 키운 감을 내가 대신 생색을 낸다.

대봉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단단한 감이 홍시가 될 때까지. 벗들은 기다려야 한다. 언제쯤이나 몰랑몰랑해질까, 이만하면 먹을 만해졌을까, 오며가며 손가락으로 한 번씩 눌러보며, 때를 기다린다. 어느덧 무심해질 무렵, 선물이 당도하듯 하나씩 완성되는 대봉 홍시의 매력. 기다리는 동안 잠깐이라도 내 생각나겠지, 그만한 답례가 오겠지,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냥 대봉을 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나 역시 대봉을 일렬로 주욱 늘어놓고 같은 시간을 보내며, 어딘가에 있을 다른 감들의 처지가 궁금해지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모과였을까? 모과는 향이 좋은 과일이다. 그래서 일단 방향제로 쓴다. 색도 어여쁘다. 가을에 맛보는 봄빛. 그냥 바구니에 담아 보기만 해도 좋다. 하지만 어느 결엔가 시커멓게 썩고 만다. 그걸로 끝. 모과 맛을 보려면 먼저 설탕이나 꿀에 재서 차로 담가야 한다. 차를 마셔도 향과 맛만 우려내고 과육은 버린다. 떫고 꺼끌거리는 식감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중화될 줄을 모른다. 방향제이거나 목에 좋은 차이거나. 다른 모과 사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왕이면 빛도 좋고 맛도 좋은 대봉 감을 보낼 것이지.

‘돈키호테’에서 산초가 바라토리아섬의 총독이 되었을 때, 첫 번째 시련은 음식이었다. 총독의 건강을 보살피는 의사라는 양반이 옆에 딱 붙어 서서 별별 이유를 들이대며 연이어 나오는 산해진미를 물리치니 산초로서는 그런 고문이 없었다. 과일은 지나치게 수분이 많아서 치워버리시라, 저건 너무 뜨겁고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서 갈증을 더하니 안 된다, 송아지 요리는 스튜로 했으면 좋으련만 구운 고기여서 안 되고, 산초가 제일 좋아하는 잡탕 요리는 시골 농부들 결혼식에서나 먹는 것이어서 안 되고. 그럼 뭘 먹으란 말인가? 의사가 말한다. 막대과자 몇 개에 모과잼(Carne de membrillo) 정도는 드셔도 됩니다요.

달콤한 가을향이 나는 모과. 소설가 천운영 제공
달콤한 가을향이 나는 모과. 소설가 천운영 제공

까르네 데 멤브리요(Carne de membrillo). 직역하자면 ‘모과 고기’인데 콩고기 같은 게 아니라 모과로 만든 잼 혹은 마멀레이드를 말한다. 그런데 이 모과잼을 특이하게 하몽집에서 살 수 있다. 고기나 두부처럼 잘라서 판다. 하몽이나 햄과는 천생연분이다. 달콤함이 햄 종류의 독특한 고기 냄새를 잘 잡아준다. 모과 육질은 껄끄럽다기보다 오돌거리는 재미가 있다. 모과잼과 함께 먹는 하몽은, 달콤하게 감싸 안는 여인 앞에서 한없이 순종적이 되는 거친 사내의 느낌이다. 모과의 의미 있는 변신이다.

다시 시를 생각한다. 모과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감나무를 바라본다. 길을 걷다 은행나무 아래 멈춰 선다. 담장 너머 늙은 모과나무를 훔쳐본다. 누군가의 기별을 기다린다. 주머니에 구슬 하나 넣고 다녀야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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