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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사전] 번역

입력
2015.07.2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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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선수단 및 관계자와의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선수단 및 관계자와의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번역은 한 나라말을 다른 나라말로 옮기는 일을 뜻하는데, 요즘 한국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 요소가 되었다. 박 대통령이 이상한 화법을 다채롭게 구사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인데, 최근에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박근혜 번역기’까지 등장했다.

박 대통령이 즐겨 구사하는 화법들에는 유체이탈 화법, 로맨스 화법, 중언부언 화법, 직시어 남용 화법, 깨알 화법 등이 있다. 유체이탈 화법은 박 대통령 스스로 관련되어 있거나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에 관해서 남의 일을 논평하듯이 하는 것이다. 유체이탈 화법은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내려 물려받은 것이지만 나머지들은 전적으로 화법의 ‘창조 경제’에 속한다.

로맨스 화법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발상의 화법인데, “도청이 없어졌다고 주장하려면 국민이 믿을 수 있도록 국정원이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고 이미 13년 전에 강조했었다는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다. 중언부언 화법은 짧게 한 줄로 해도 될 문장을 보통 원고지 한 매 이상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직시어란 ‘이것, 이 만큼, 이렇게, 그것, 저런, 어떤’ 등과 같이, 말하는 맥락에서 무엇인가를 직접 가리키는 단어들을 뜻하는데, 보통은 유아들이 자주 사용한다. 깨알 화법은 수첩에 얼굴을 파묻고 읽어나가면서 깨알 같은 지시와 주문을 길게 쏟아내는 화법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북아시아의 근대화에는 번역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이전까지 없던 문물과 제도를 들여오기 전에 먼저 그것들을 가리키거나 뜻하는 말이나 개념들을 번역해내야 했다. 예컨대 ‘사회’와 ‘회사’, ‘권리’와 ‘이권’ 등이 그러한데, 이 말들에 상응하는 유럽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한자어 음절을 서로 자리바꿈시킴으로써 아주 다른 뜻의 개념적 표현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마터면, “인간은 회사적 동물이다”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 이권이다”가 될 뻔했던 것이다.

‘정치’와 ‘행정’이란 말들도 번역어다. 중국의 아편전쟁 직후 서구의 삼권분립 제도를 소개하는 문헌에서 입법, 사법, 행법(行法)이라는 말이 쓰였다. 그러다가 행법과 행정이 더불어 쓰이던 시기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행정이란 말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행정이란 말 자체는 ‘맹자’에도 나오고 ‘사기’에도 나오는 표현이었는데 ‘administration’의 번역어로 채택된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행정’은 정무를 행하는 것을 아주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의미했는데 단일한 어휘는 아니었고 명사로도 쓰이지는 않았다.

‘정치’는 ‘주례’ 및 ‘한서’에 나오는 표현이었는데 이 역시 근대적 의미의 정치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고 기본적으로는 아랫것들을 교화시킨다는 취지였다. 초기에는 ‘politics’의 번역어로 정사(政事)라는 말이 쓰이다가 나중에 ‘정치’로 바뀌게 되었다.

번역어는 아니지만 1960~70년대까지 한국 신문의 정치면과 사회면에 가끔 등장하던 말로 민도(民度)라는 게 있다. 이 말은 1870년대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했던 일본식 근대 한자어다. 민도라는 말은 아직 국민, 시민 등의 생활 수준 및 정치, 문화 수준이 낮았던 시절에 만들어진 말이며,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근대화와 관련이 있는, 식산, 흥업, 육성, 계도 등과 같은 어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의 이상한 화법은 책임 정치나 행정 책임과 같은, 근대적 원리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려는 데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의 말에 대한 번역의 시도는 정치적 풍자 내지는 조롱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상한 화법을 구사하면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대통령을 뽑은 이는 바로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다. 주권재민 및 삼권분립의 원리, 그리고 정치적, 행정적 책임 원리에 관한 현실 수준으로만 따진다면, 우리의 민도가 여전히 19세기 수준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닌 셈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 말인 “Traduttore, traditore(번역자, 반역자)”를 번역한 것이다. 소리라는 점에서도 아주 멋들어진 격언이고 번역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 상황은 번역과 반역 중에서 딱 하나만을 골라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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