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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퇴사 판타지, 판도라, 그리고 판갈이

입력
2017.12.12 14: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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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를 마무리하며 그동안의 퇴사 관련 흐름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퇴사 패러다임에는 크게 3단계가 있다.

1단계는 ‘퇴사 판타지’이다. 사람들은 퇴사에 대한 지나친 환상 또는 지나친 두려움을 갖고 있다. TV에서 누가 퇴사하고 여행가고 창업하며 자유를 찾는다? 마냥 부러우면서도 괜히 악플을 달고 싶다. ‘분명 저 사람은 금수저일 거야. 나와는 상관없어.’ 그러면서 하루 종일 퇴사를 말한다. ‘나 퇴사할거야’ 하루 종일 이 말을 달고 살던 동료는 몇 년째 잘만 다니고 벌써 과장, 차장을 달았단다. 오히려 아무 말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사직서를 내민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사를 ‘말’한다. ‘퇴사를 부르는 직장상사 유형 5가지’, ‘퇴사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등. 뉴스와 방송과 서적, 페이스북, 브런치, 웹툰 등 미디어에서는 이제 ‘퇴사’를 빼고서는 직장인을 논할 수 없어졌다. 적어도 퇴사라는 단어는 이제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되었다.

2단계는 ‘퇴사 판도라의 상자’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열린다. 그것은 두려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갖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어떤 사람들은 퇴사를 기대한다. ‘나를 찾아’, ‘진짜 인생’, ‘지긋지긋한 회사를 탈피하여’, ‘기계처럼 살지 않겠다는’, ‘진짜 하고 싶은 일’, ‘창업’ 이런 단어들을 기대하며 상자를 연다. 또 어떤 사람들은 퇴사를 두려워한다. ‘언젠가 오겠지만’, ‘벌거벗은’, ‘사회적 죽음’, ‘명함 없는 인생’, ‘나가서 뭐하지’, ‘월급 없는 삶’ 이라는 죽음 다음으로 큰 스트레스와 불안에 직면한다.

에피메테우스의 아내인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모든 게 빠져나가고 단 한가지 상자 안에 남은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낼 것이라는 희망. 창업, 여행, 휴직, 재취업, 이직, 1인기업, 프리랜서, 부업, 같지만 또 다른 회사생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은 ‘말’로만 투덜대지 않고 묵묵히 ‘실행’을 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개인의 대안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3단계는 ‘퇴사 판갈이’이다. 판을 갈아엎는다. 개인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인 맥락을 보자는 것이다. 왜 이렇게 요즘 퇴사가 열풍인가? 왜 퇴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걸까? 단지 요즘 것들이라서? 세상이 달라져서? 4차 산업혁명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져서? 희망퇴직이 늘어나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이슈들은 어떤 거대한 판 위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경제, 정치, 교육, 복지, 회사, 미디어 등 퇴사에 대한 고민과 문제점들이 있다면 이를 단순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으로 해석하고 공공의 집단의 해결책을 찾는 것 역시 당연하다.

‘퇴사 판타지’가 배설용이라면 ‘퇴사 판도라’는 희망을 찾는 과정이다. ‘퇴사 판갈이’는 이러한 희망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단계이다.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언젠가는 되어야 하는 일이다. 이제는 퇴사에 대해 개인적 차원으로만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대안과 협의가 필요한 때가 되었다.

1년 전 광화문에서 전직 대통령을 판갈이한 것처럼, 직장인을 위해서도 사회와 회사 차원에서 판갈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 모두 퇴사를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실업률’만큼 ‘퇴사율’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퇴사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고 책임을 전가하지 말자. 국가와 사회, 회사가 나서서 퇴사를 둘러싼 문제와 대안에 대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작은 변화의 불씨가 생기기 바란다.

장수한 퇴사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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