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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일왕이 되물은 일본의 정체성

입력
2016.09.0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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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82세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노화와 건강 문제를 들어 더는 왕 노릇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일본인은 너무나 솔직한 그의 현실 인식과 인간성에 공감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왕의 생전(生前) 퇴위 언급을 그의 아버지 히로히토(裕仁)가 1946년 ‘살아있는 신’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것에 빗대 제2의 ‘인간 선언’으로 평가할 정도이다.

그는 왜 살아서 물러나려 할까. 여러 해석이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죽음이 낳을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는 “천황이 죽으면 무거운 장례행사가 두 달 동안 이어진다”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는 본인의 죽음이 미칠 파장을 그만큼 우려한다는 의미이다. 민주 공화제인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일본에서 천황의 죽음은 총리를 포함한 ‘일반인’의 죽음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격이 다르다. ‘상징 천황’에 불과하다지만 일왕의 죽음은 일본 전체의 ‘상징적’ 죽음, 일종의 정체성 혼란을 연출할 수도 있다.

정확히 28년 전인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 일왕이 죽었을 때 일본 전역은 적어도 이틀 이상 그와 함께 죽었다. TV는 광고는 물론이고 노래, 드라마 등 ‘오락행위’를 완전히 중단했다. 술집 등 가게들도 셔터를 내렸다. 웬만한 이벤트도 모두 취소됐다. 칠흑 같은 어둠이 네온사인을 대신했다. 자숙(自肅) 분위기에 압도된 청춘남녀들은 예정된 결혼식마저 미뤄야 했다. 쇼와(昭和) 라는 시간이 끝나자 일본도 멈춘 것이다. 아키히토는 자신의 죽음이 아버지의 경우처럼 음습한 사태를 만든다면 시대착오적 돌발 상황을 만들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분명 인간적이다. 동시에 이렇게까지 사려 깊다니 매우 정치적이다.

전후 일본은 ‘상징’ 천황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은 천황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진작에 ‘A급 전범’으로 처단됐어야 할 일왕이 존재하는 한 일본은 아마 앞으로도 식민지 지배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후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하는 대가로 승전국 미국에 주권적 권리를 일부 내줘야 했고, 결국 ‘불완전한 국가’가 됐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미국이야말로 ‘실질적 천황’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일본은 ‘평화국가’로서 경제대국을 구가할 수 있었다. 어쨌든 ‘상징’ 천황과 ‘전쟁을 포기한’ 국민국가로서의 일본은 한 몸인 것이다.

아키히토는 이런 일본, 즉 적어도 헌법으로나마 ‘평화국가’를 지향해온 일본을 표상하면서 그 방향으로 국민을 묶어내는 역할을 해왔다. 이를 위해 그 자신은 철저하게 ‘모범적인’ 삶을 감내했다. 일본 국민도 이런 천황을 경외하며 자신을 삼갔다. 이는 개헌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꿈꾸는 아베 신조 총리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결이 다르다. 아베가 일종의 ‘현상타파’를 추구한다면, 아키히토는 어떻게든 현행 헌법을 통해 황실과 국민과의 관계, ‘전통’을 유지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왕이 던진 문제는 간단치 않다. 아베 정권이 중ㆍ참의원 모두에서 3분의 2 이상의 개헌 의석을 확보한 가운데 ‘상징적 신’ 일왕이 직접 노구를 이끌고 국민에게 일본은 누구냐고 강하게 되물은 것이다. 아베 정권은 일단 특별법 제정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천황의 고민을 단순화시켜 봉합한 다음에 개헌을 향한 주판알을 튀길 심산인 듯하다. 하지만 전쟁을 포기한 현행 헌법이 ‘상징’ 천황제로 대변되는 전후 일본의 정치구조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는 이상, 일본판 ‘역사 논쟁’을 비껴가긴 어려울 것이다. 이 기회에 일본인들이 과거사를 보다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성, 영위 방식을 재고하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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