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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미해결의 해결, 일본에 '독도 몽니' 명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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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미해결의 해결, 일본에 '독도 몽니' 명분 줬다

입력
2015.05.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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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한일회담서 독도문제 대두

최종 담판서 독도 명시 않는 대신 분쟁 대상에 포함시킬 여지 남겨

한미일 외교문서엔 독도문제 관련 JP의 타협적 태도 곳곳에 적시

제3국 조정안 JP 독단 의혹, "독도 밀약 헛소문" 주장도 의문

1965년 6월22일 일본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열린 한일조약 제협정 조인식에서 이동원 외무장관이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오른쪽)와 환담하고 있다. 두 사람은 조인식 직전에 독도 문제와 관련된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 대한 막판 문구 조율을 마쳤다. 사토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면서 아베가 존경한다는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다. 왼쪽은 김동조 당시 주일대사. 출처 국가기록원
1965년 6월22일 일본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열린 한일조약 제협정 조인식에서 이동원 외무장관이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오른쪽)와 환담하고 있다. 두 사람은 조인식 직전에 독도 문제와 관련된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 대한 막판 문구 조율을 마쳤다. 사토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면서 아베가 존경한다는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다. 왼쪽은 김동조 당시 주일대사. 출처 국가기록원

“이것은 다이너마이트와 같다. 한국의 야당과 대중은 일본의 야당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이다. 독도 문제는 한국 정부의 사명(死命)과도 관련된다. 우리는 ‘두 나라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과 같이 ‘발생하는’을 삽입하길 원한다.”(이동원)

“지금까지 일본이 내놓은 제안조차도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양보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양보는 불가능하다.”(사토 에이사쿠)

“발생하는 이란 표현을 삽입하면 미래의 분쟁에 한정되어 다케시마 문제는 제외된다는 것이 분명해지므로 불가하다.”(우시로쿠 도라오 외무성 아시아국장)

“그렇다면 좋다. 일본측의 최종안을 수용하는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겠다. 한국 대표단이 귀국해서 여기에는 독도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즉각 반박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 다만, 일본이 나중에 의회에서 독도가 포함된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더라도 이를 자제하라고 부탁하지는 않겠다.”(이동원)

한일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인 1965년 6월22일 오후 4시15분부터 20분간 일본 총리관저에서 이동원 당시 외무부장관과 사토 에시사쿠(佐藤榮作) 일본 총리는 이렇게 독도 문제를 놓고 막판 담판을 벌였다. 이 장관이 일본측 최종안을 수용하면서 합의, 조인된 이른바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은 아주 짧게 그것도 매우 애매한 문구로 구성됐다.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을 통해 해결하기로 한다.”

‘미해결의 해결’이 남긴 함정

여기에는 우선 일본측이 집요하게 넣자고 요구했던 독도라는 단어가 빠져 있어 독도가 분쟁거리인지 여부를 바로 알 수 없다. 더욱이 사실상 강제력이 없는 ‘조정’에 대해서도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라는 조건이 붙었다. 다만 한국측이 당초 주장했던 ‘양국 간에 발생하는 분쟁’이라는 미래형 문구가 사라진 대신 ‘양국 간의 분쟁’이라는 현재형 표현으로 귀착되어 독도가 실재하는 분쟁 지역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겼다. 더욱이 이동원이 독도가 분쟁지역인지 여부에 대해 한일 양측이 각각 해석하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제안하고, 이를 사토가 양해함으로써 일본은 한국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은 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는 ‘미해결의 해결’이라고 말한다. 독도를 사실상 분쟁지역으로 인정할 여지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실효적 지배라는 현상을 타파할 수 없도록 조치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라는 조항에 따라 일본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지배를 군사적 행동에 의해 변경할 수 없게 됐다. 또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을 통해 해결하기로 한다’는 조항에 의해 한국이 동의하지 않는 한 일본이 주장하는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포함한 ‘조정’이 불가능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교환공문을 근거로 독도를 분쟁화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됐다. “교환공문에는 다케시마가 분쟁거리가 아니라고는 적혀있지 않다. 그렇다면 당연히 양국 간의 분쟁 대상이 된다. 한국이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해결이 안 되면 조정에 건다고 되어 있는 만큼, 조정 자체를 거부한다면 조약 위반이다.” 시이나 에츠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상은 1965년 10월25일 열린 중의원의 특별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 같은 해석에 기초해 일본은 2012년 한국이 ICJ 제소에 동의하지 않으면 일방적 제소도 불사하고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1965년의 교환공문에 따라 ‘조정’에 회부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영토문제를 ‘미해결의 해결’이라는 정치적인 거래로 매듭지은 ‘1965년 체제’의 후유증을 톡톡히 앓고 있는 셈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독도를 찾은 한국산악회 울릉도ㆍ독도 조사단이 앞서 1년여 전에 일본측이 박아 놓은 일본식 행정구역 표시 나무말뚝을 뽑아내고 한국령을 알리는 표지석과 태극기를 게양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독도를 찾은 한국산악회 울릉도ㆍ독도 조사단이 앞서 1년여 전에 일본측이 박아 놓은 일본식 행정구역 표시 나무말뚝을 뽑아내고 한국령을 알리는 표지석과 태극기를 게양했다.

김종필 ‘독도 폭파’ 언급의 진위

당초 독도 문제는 한일회담의 주제가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가 1952년 1월 이른바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선언해 독도를 편입하고 실효 지배하기 시작하자 일본측은 ‘불법점거’라면서 ICJ 제소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이를 한일회담의 석상에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이런 독도가 한일회담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 청구권 자금 확보를 위해 정치적 도모에 착수한 1962년 이후이다.

그 해 9월3일 열린 제6차 한일회담의 제2차 정치회담 예비교섭에서 이세키 유지로(伊關佑二郞)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국교정상화 후에 ICJ에 제소하겠다는 것만 미리 정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배의환 한국측 수석대표는 “중요하지도 않는 섬인데다 한일회담의 의제도 아니므로 국교정상화 후에 토의하자”고 비켜나갔다.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독도 폭파’ 발언도 일본의 분쟁화 시도를 무력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저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과의 청구권 협상에서 ‘독도 폭파’를 언급한 것과 관련해 “어떤 경우에도 당신들에게 내줄 수 없다”고 강조하기 위한 비유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미일 외교문서는 독도 문제에 관한 한 김씨의 타협적인 태도를 곳곳에 적시하고 있다. 우선 1962년 10월20일 열린 오히라와의 1차 협상에서 김씨는 “이 문제가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다는 태도로, 그런 문제는 방치해도 지장이 없다는 말투로” “명시적으로 (ICJ 제소에) 승낙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았으나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었다”고 일본 외교문서는 전한다. 이어 이틀 후 가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의 회담에서 김씨는 두 차례에 걸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문제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 이 섬을 폭파해 버리자고 말했다. 이에 당황한 이케다가 오히려 “이것은 감정적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면서 국제재판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거듭 주장했다고 한다. 이어 일주일 후인 10월29일 가진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도 김씨가 독도 폭파를 언급했다고 미국 외교문서는 전한다. 김씨는 오히라와의 청구권 협상을 마치고 귀국길에 나선 11월13일 하네다 공항에서도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밝혔다고 한국 외교문서가 말한다.

김종필의 ‘제3국 조정안’과 ‘독도 밀약설’

더욱이 김종필씨는 일본이 거듭 독도 문제의 ICJ 제소를 주장하자 ‘제3국 조정안’을 대안으로 제시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훈령과도 다른 것이었다. 제2차 김종필-오히라 회담 직전에 통보된 훈령은 “이 문제가 한일회담의 현안 문제가 아니고, 한국민에게 일본의 한국 침략을 상기시킴으로써 회담 분위기를 경화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의 행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김씨는 1962년 11월12일 열린 회담에서 처음에는 “이 문제를 ICJ에 제출하면, 가령 2, 3년 후라고 하더라도 승패 구별이 분명한 판결이 나와 적당하지 않다”고 일본측의 ICJ 제소안에 맞섰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제3국의 조정에 맡기는 것을 희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제3국이 한일관계를 고려하면서 조정의 타이밍 및 내용을 탄력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도가 ‘조정’의 대상이라는 점을 실질적으로 인정한 김씨의 이 언급에 대해 당시 한국 외교부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 부장의 의도는 ICJ 제소를 위한 일본측의 강력한 요구에 대해 몸을 피하고 사실상 독도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작전상의 대안으로 시사한 것으로 생각됨.” 여기서 ‘생각됨’이라고 말한 것은 ‘제3국 조정안’이 정부 훈령을 넘어선 김종필씨의 단독 제안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하간 김씨가 ‘조정’을 언급한 이후 일본은 보다 구속력 있는 ‘제3국 조정안’을 포함해 어떻게든 독도를 분쟁화해 한일회담에서 이를 조문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굳히고 더욱 달려들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미해결의 해결’이라는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이었다.

한편, 김종필씨는 전기한 회고에서 1964년 말부터 65년 초에 김씨의 셋째 형인 김종락 한일은행 상무가 정일권 당시 총리의 대리인으로서 일본을 방문해 독도 문제에 관해 별도의 비밀 합의문서를 교환했다는 이른바 ‘독도 밀약설’에 대해선 ‘헛소문’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최소한 일본측 외교문서를 참조하는 한 김종락씨와 독도 공유론을 주장해온 고노 이치로(河野一郞) 당시 일본 농림상과의 극비 라인이 활발하게 가동되어 관련 문서까지 작성됐다는 점은 확인이 된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과 사토 총리 등 양국 정상이 이를 승인했는지 여부 등은 불투명하다. 일본 외교문서는 “당시 교섭내용에 대한 기록과 양측이 제시한 문안 등을 보관하고 있다”고 적시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이를 공개하고 않고 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로서도 분쟁의 현상유지를 골자로 한 ‘밀약’의 존재를 드러내는 게 국내정치적으로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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