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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매출 3000억원 넘으면 가업 상속공제 못받아...일부러 투자 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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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매출 3000억원 넘으면 가업 상속공제 못받아...일부러 투자 안해요”

입력
2017.11.23 04:4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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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가업 승계 조건

피상속인 최소 10년 이상 경영 등

공제 혜택 심사 조건부터 난관

승계 후에도 자산 20% 매각 금지

경쟁력 잃어가는 유망 기업

많게는 수천억원 상속세 부과

공제 받으면 업종 변경도 못해

생존 패러다임에 한발 뒤쳐저

#1 생활ㆍ부엌 용품을 생산하는 중견기업 A사는 2012년 창업주가 암 발병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상속세 문제에 휘말렸다. A사 연 매출은 2,000억원으로 원래 ‘가업상속공제 적용’(연 매출 3,000억원 미만) 대상 기업이었지만, 회사가 2003년 설립됐기 때문에 피상속인(물려주는 사람)이 10년 이상 회사를 경영해야 한다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받지 못했다. 장남은 물려받은 지분 일부를 매각해서라도 수백억원 규모의 상속세를 내고 가업을 이어가려 했으나 매수자가 ‘경영권을 담보하지 않는 일부 주식은 사지 않겠다’고 고집해 결국 모든 지분을 팔고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2 상속공제 혜택으로 상속세를 내지 않고 아버지가 세운 중소기업(금속 가공업)을 물려받은 김 모 대표는 인천에서 가동 중인 공장을 시외 지역으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했다. 그는 공장을 땅값이 싼 시외 지역으로 이전하고 남는 돈으로 신규 투자를 할 계획이었지만, 가업 승계 후 10년간 회사 자산의 20%를 처분하면 안 된다는 사후관리 조건에 묶여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김 대표는 “상속공제 혜택을 받고 회사를 매각하지 말라는 법의 취지는 알겠지만, 신규 투자를 위한 회사자산 매각은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현행 상속공제 혜택은 중소기업을 물려받아 키우지 말고 유지만 하라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경제 성장 동력인 중소ㆍ중견 기업들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가업 승계 여건에 발이 묶여 외국 기업에 비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22일 중견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연 매출 3,000억원 이상을 기록해 기업상속공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중견기업은 전체 중견기업의 15.1%인 450개에 달한다. 매출 기준을 초과해 상속 공제 혜택을 못 받는 기업 수가 9년 후인 2026년에는 1,410개로 연평균 12%씩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매출 3,000억원 이상 중견기업들은 우리나라 경제의 허리를 받치는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기업 중 해당 업계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은 각각 73곳과 63곳에 달한다. 또 전체의 56%는 5위권에, 78%는 10위권에 포진해 있는 등 대부분 해당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들이다. 문제는 이들 기업이 가업 승계를 시도할 때 적게는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의 상속세가 부과될 수 있어, 회사 문을 닫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경기도에서 건설자재 관련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이 모 대표는 “상장이 안 된 기업의 가치는 직전 몇 년간의 매출 등으로 계산이 되기 때문에 실제 기업 가치에 비해 상속세가 과도하게 부과될 수 있다”며 “또 매출액 3,000억원을 넘으면 가업상속 공제 혜택을 못 받게 되니 그 선을 안 넘으려고 상속 전 투자를 일부러 안 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대기업에 전자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박 모 대표도 “업계를 주도할 수 있는 중견기업들이 상속세에 발목이 잡혀 제때 투자를 안 하는 것은 국가 경제에도 엄청난 손해”라며 “가업 승계를 위한 제도적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까 기업들의 에너지가 절세 방법을 찾는 등 다른 곳에 낭비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 매출 3,000억원 미만의 기업이라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 기업은 ‘피상속인 최소 10년 이상 경영’, ‘상속인 상속 받기 2년 전 기업 종사’ 등 여러 가지 엄격한 조건에 걸려 공제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태련 한국가업승계기업협의회 부회장은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은 몇십억원이 아니라 단 몇억원의 상속세도 내지 못해 쩔쩔매는 경우가 많다”며 “매각이라도 되면 다행이지만 중소기업은 창업주 신용을 보고 거래하는 곳이 많아, 유망기업이라도 창업주가 별세하면 기업 가치가 급락해 매각도 안돼 그대로 폐업 수순을 밟기도 한다”고 말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 공제 혜택을 받아 상속을 무사히 마친 기업도 ‘업종 변경 제한’ 등의 엄격한 사후관리 조건 때문에 투자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자산 매각으로 기존 사업을 강화하려고 해도 ‘기업 자산 20% 매각금지’ 요건 때문에 현상 유지하기에 급급하다. 제조업에서 IT 사업으로 업종 변경을 꾀하다 공제받은 상속세를 다시 내야 한다는 사실에 이를 포기한 한 중소기업 대표는 “기술 발달로 산업 패러다임이 빠르게 변하는데 업종 변경을 제한하면 기업이 도산 할 수 있다”며 “생존을 위한 업종 변경과 자산 매각 등은 융통성을 발휘해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재용 기자 ins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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