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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측 수시 검문… 생계 위협

입력
2017.06.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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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자치정부 행정수도 라말라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 택배기사 파디. 이슬람 단식성월 라마단 동안 택배 물량이 폭증해 파디는 이날을 비롯해 약 한달간 하루 18시간씩 일했지만 "일을 하는 것만해도 행운"이라며 웃어 보였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 행정수도 라말라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 택배기사 파디. 이슬람 단식성월 라마단 동안 택배 물량이 폭증해 파디는 이날을 비롯해 약 한달간 하루 18시간씩 일했지만 "일을 하는 것만해도 행운"이라며 웃어 보였다.

팔레스타인인 파디(39)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제닌의 택배 기사다. 제닌을 비롯해 나블루스, 툴카렘 등 서안지구 북쪽 전역에 물품을 배달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와 파디가 처음 만나던 2012년 2월만 해도 그의 직업은 달랐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요르단 계곡에서 혼자 길을 잃고 헤맬 때 필자를 ‘구조’해 준 파디의 생업은 휴대폰 판매 영업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2014년 11월 그는 제닌에서 휴대폰 액세서리 노점상을 하고 있었다. 그간 무슨 일들이 파디를 스쳐 간 걸까.

지난달 14일 오후 4시(현지시간)쯤 파디는 제닌의 숙소 앞으로 택배 차량을 몰고 왔다. 아직 배달이 많이 남았다는 파디의 말에 미니밴에 올라타 팔레스타인을 깊숙이 둘러볼 겸 남은 일정 동안 동행하기로 했다. 파디는 지난 일을 묻자 “2014년 제닌 시 당국이 내 노점상을 철거했다”며 “일자리가 너무 필요하니 이스라엘 국경을 넘었는데 노동 허가증이 없다 보니 바로 붙잡혀 한 달 간 실형을 살았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이후 이스라엘 브로커에게 60만원이란 거금을 주고 노동 허가증을 샀지만 유효하지 않은 허가증이라며 다시 입국을 금지당했다. 결국 제닌에서 간판 디자인, 의류 판매 등 여러 일을 전전하다 택배기사가 됐다.

겨우 자리를 잡았지만 택배 운송을 하면서도 파디의 삶을 위협하는 장애물은 곳곳에 놓여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운전 중 휴대폰을 사용하면 벌금을 무는데, 팔레스타인 경찰에게 걸리면 5만원이면 끝이지만 이스라엘군에 걸리면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 물론 파디는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도 업무용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택배 수취인이 집에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주소 체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물어봐야 해서다. 이스라엘군이 임의로 설치하는 검문소도 문제다. 길 위에서 이스라엘 측의 불시 검문이 있을 경우 신분증이 없으면 구금을 당할 수 있으며, 신분증이 있어도 때에 따라 검문이 길어져 시간이 지체되기 일쑤다.

이스라엘 군인이 22일 요르단강 서안지구 남쪽 소도시 헤브론 길가에서 한 팔레스타인 남성을 불시 검문해 몸 수색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이스라엘 군인이 22일 요르단강 서안지구 남쪽 소도시 헤브론 길가에서 한 팔레스타인 남성을 불시 검문해 몸 수색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길 위에서도 이스라엘의 존재감은 역력하다. 파디와 다니며 본 서안지구 북부의 도로 일부에는 붉은색으로 ‘이스라엘인 출입 금지’를 알리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관할 A구역 표지판이 놓여 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들어선 자치 정부가 오롯이 관할하는 A구역은 서안지구의 18%에 불과하다. B, C구역에 해당하는 82%를 이스라엘군이 통제한다. B, C구역에는 4차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며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 유대인 정착촌이 포진해 있는데, 이스라엘군이 이들 정착민을 위해 A구역 진입 금지를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한 것이다.

세 구역의 구분은 마을의 밝기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다. 어스름한 저녁 자치 정부가 관할하는 대도시가 아닌 탓에 가로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여기도 예외는 있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 정착민을 위해 가로등을 설치한 B 혹은 C구역이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유대인 정착민을 위한 이스라엘 버스가 다녀 버스를 마주칠 때면 ‘아 BㆍC구역이구나‘라고 알아챌 정도였다.

이슬람 단식성월 라마단 중이어서 온종일 굶은 채 일한 파디는 오후 7시쯤 이날의 첫 끼니인 ‘이프타르’를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집에 들렀다. 하지만 꿀 같은 휴식도 잠시, 식사 직후 정전이 찾아왔다. 하루 2시간만 전력이 공급되고 있는 가자지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안지구 대다수 도시와 마을에선 여름에 매일같이 정전이 발생하고 있다.

오후 9시 파디와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행정수도 라말라에 위치한 물류센터를 향해 이동한 지 약 2시간만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하차 후 지역별 배송 분류까지 마쳤지만 서안지구 남쪽 도시 헤브론에서 오기로 한 차량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새벽 1시에 출발해도 제닌에 2시30분쯤 닿는데, 헤브론 측 차량을 기다리다 결국 출발이 2시간이나 미뤄졌다. 오전8시면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파디는 헤브론 기사를 비난하기는커녕 늦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이스라엘군의 검문소 때문임을 알아서다. 오늘은 헤브론 기사가 늦었지만 언제든 자신도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음을 파디는 이미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 파디는 “늦은 밤 다른 차 하나 없이 우리가 도로를 차지하고 있으니 ‘나이스 드라이브’ 아니냐”고 농담을 던졌다. 긍정과 체념 없이 서안지구에서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제닌=뎡야핑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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