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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간디의 소금(4.6)

입력
2018.04.06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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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소금전매법에 항의, 1930년 3월 간디가 시작한 소금 행진이 4월 6일 끝이 났다.
영국의 소금전매법에 항의, 1930년 3월 간디가 시작한 소금 행진이 4월 6일 끝이 났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독립운동이 처음부터 대중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가트 싱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무장 독립운동의 위력과 존재감이, 적어도 1930년 전까지는 더 컸다. 영국이 약속했던 1차 세계대전 참전과 피의 대가가 사실상 없었고, 호주나 캐나다 등 영국서 먼 자치령 식민지가 누리던 자치의 과실을 인도는 얻지 못했다. 총독 정부는 오히려 로울럿 법(Rowlatt Law, 1919년)을 제정, 언론ㆍ집회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도인을 영장 없이 체포하고 재판 없이 구금했다. 그런 실정이어서 비폭력 저항보다는 1919년의 러시아 혁명이 인도 지식인과 청년들에게는 더 현실적인 저항 모델이었다. 1919년 펀잡 주 암리차르(Amritsar)의 비폭력 시위 군중 379명이 영국 군대와 치안경찰의 총격에 학살되기도 했다.

간디의 저항운동은 1930년 ‘소금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 향한 헌신)’ 이후 표나게 헤게모니를 획득했다. 1882년 영국이 제정한 인도의 소금법, 즉 한국의 담배처럼 정부가 소금 생산을 독점해 세금을 매기는 데 대한 불복종 운동이었다. 1차 대전 전비 지출과 29년 대공황 여파로 재정이 어려워진 영국은 인도 소금 세율을 인상했다. 간디는 1930년 3월 12일 78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근거지였던 사바르마티 사스람(Sabarmati Ashram)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4월 6일까지 24일간 그는 구자라트(Gujarat)의 단디까지 주로 해안을 따라 약 390㎞를 행진했고, 마을을 지날 때마다 소량의 소금을 생산해 주민들과 나눠 먹었다. 행진이 끝날 무렵 대열은 6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진압하고 연행하던 총독 정부는 대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국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도 간디의 위력을 비로소 실감했다.

그는 행진 직후 구금됐지만, 사실상 승리했다. 그 승리는 비폭력 노선과 철학의 승리로 평가 받지만, 탁월한 정치 감각 덕이기도 했다. 인도가 의회제와 참정권, 지방자체제 등 실질적 자치령 지위를 획득한 것도 저 행진 이후, 1935년 인도 통치법 개정 이후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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