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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림자 벗었다, 대세론 업고 ‘숙명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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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림자 벗었다, 대세론 업고 ‘숙명의 싸움’

입력
2017.04.03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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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 출신 연탄 배달하며 고학

학생운동 전력에 판사 임용 좌절

변호사 시절 노무현과 동지로

18대 대선에선 盧의 상속자로

안철수와 단일화 진통 겪기도

朴에 패배 후 ‘필패론’ 꼬리표

총선서 위기의 민주당 이끌어

‘적폐청산’ 19대 대선 도전

“더 이상 운명은 없다, 숙명이다“

울산 경찰서에서 현대중공업 이형진 노조위원장, 남적회 부위원장을 서석재, 심완구 의원과 문재인(오른쪽 두 번째) 변호사가 면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울산 경찰서에서 현대중공업 이형진 노조위원장, 남적회 부위원장을 서석재, 심완구 의원과 문재인(오른쪽 두 번째) 변호사가 면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울산 경찰서에서 현대중공업 이형진 노조위원장, 남적회 부위원장을 서석재, 심완구 의원과 문재인(오른쪽 두 번째) 변호사가 면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울산 경찰서에서 현대중공업 이형진 노조위원장, 남적회 부위원장을 서석재, 심완구 의원과 문재인(오른쪽 두 번째) 변호사가 면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19대 대선에 도전하면서 “더 이상 운명은 없다. 숙명이다”는 말을 되뇌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계승자로 운명처럼 떠밀리듯 나섰지만 이번 도전은 숙명이라는 것이다.

문 후보는 대선 재수에 나서며 ‘적폐청산’을 핵심 슬로건으로 들고 나왔다. 그는 이에 대해 “지난 대선보다 훨씬 절박해졌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지난번에 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발생한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사건이 대선 출마의 확실한 명분이 됐다는 것이다. 문 후보는 그래서 대선 재수를 ‘지난 대선에서의 패배를 책임지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가족사진. 문재인 캠프 제공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가족사진. 문재인 캠프 제공

<1막> 문재인 대망론

30년 지기인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는 변호사를 평생의 천직으로 여겼던 문 후보를 대선판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민정수석으로 끝낸다. 나에게 정치하라고 하지 말아달라”는 두 가지 조건을 걸고 참여정부 청와대에 입성했지만, 결국 전부 지켜지지 않았다. 문 후보는 저서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적었다.

문 후보는 1953년 경남 거제의 피란민 가정에서 태어나 온 가족이 연탄배달로 생계를 이어간 집안에서 고학을 했다. 부산 영도 판잣집에 살던 시절 예닐곱 살 문재인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신선동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긴 줄을 서야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 경남고에 입학한 문 후보는 싸움에 말려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할 정도로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했다.

문 후보는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1972년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학생운동에 나섰다 구속된 전력이 있다. 이후 강제징집 당해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됐는데 당시 여단장이 전두환 준장, 대대장이 장세동 중령이었다. 경선 과정에서 ‘전두환 표창’ 발언 논란이 나온 배경이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제대 후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고도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자 변호사의 길을 위해 1982년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노무현ㆍ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 간판을 내걸고 지역의 시국사건들을 도맡은 두 사람은 누구보다 죽이 잘 맞는 동지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이 1988년 총선에서 당선되자 문 후보는 “뒷일은 맡기고 정치권으로 가시라”며 자신은 지역에서 인권 변호사로 남았다. 대학 2년 후배인 김정숙 여사는 법대 축제 때 처음 만나 7년 여의 연애 끝에 연수원 재학시절 결혼했다.

문 후보는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이듬해 2월 사퇴한 다음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다. 건강 악화와 열린우리당의 총선 출마 요청을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네팔 현지에서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접하고 급거 귀국한 그는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참여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함께했다. 문 후보는 청와대에서 원칙주의자로 통했다. 굳게 다문 입에 말을 극도로 아끼는 비정치적인 태도의 ‘뻣뻣한 부산 남자’를 두고 당시 기자들은 “절대 정치는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는 그를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정치인의 길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30년 동지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절제력과 의연함을 보여준 상주 문재인에 주목했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에 힘 입어 친노 진영을 중심으로 문재인 대망론이 일었고, 결국 2012년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문재인(맨 왼쪽)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아내 김정숙(왼쪽 두 번째)씨의 대학시절. 문재인 캠프 제공
문재인(맨 왼쪽)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아내 김정숙(왼쪽 두 번째)씨의 대학시절. 문재인 캠프 제공

<2막> 문재인 필패론

문 후보는 18대 대선에서 안철수 당시 대선 후보와의 단일화 진통 끝에 야권 단일주자가 됐으나 박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역대 대선 패배후보로는 최대라는 48.02%(1,469만2,632표)의 득표율을 얻었지만, 끝내 진영대결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후 ‘권력 의지가 약하다’ ‘노무현의 복수 외에는 내세울 만한 시대정신이 없다’ 등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또 확장성의 한계 때문에 차기 대선에서 아무리 잘해도 그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혹평도 나왔다. 이른바 ‘문재인 필패론’이다. 19대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그를 계속 괴롭힌 게 필패론이다. 특히 비노 진영에서는 ‘무난한 문재인이 대선후보가 되면 무난하게 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선 패배 후 정치적 동안거에 들어갔던 문 후보는 2013년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를 펴내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국가정보원 정치개입 사건, NLL포기 논란 등이 그를 세상 밖으로 다시 이끌었다. 문 후보는 자신의 대선 패배에 관해 “거기까지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소명의식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대권 재도전의 길을 걸었다. 문 후보가 당권에 도전하면 친노와 비노 간 계파갈등이 증폭되고 정치 공세에 휘둘려 대선후보로서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만류의 목소리에도 출마를 강행, 자신의 능력을 검증 받는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1년이 채 안 되는 당 대표 기간은 비노 진영의 끊임없는 ‘문재인 흔들기’의 연속이었다. 당권을 장악하고 친노 진영을 친문(親文) 세력으로 전환했지만, 친문 패권주의라는 새로운 공세에 시달렸다. 문 후보는 4ㆍ29 재보선 패배 이후 당의 공천 혁신안을 둘러싼 반발에 “혁신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며 재신임 카드로 응수했다. 이로 인해 불거진 안철수 등 비노 의원들의 탈당사태 때는 밤새 소주 2병을 마시며 “정말 정치가 싫어지는 날”이라고 고통스런 심경을 드러냈다. 그러나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다”고 정면돌파를 선언하고 안철수 후보의 탈당에 따른 빈 공간을 복원하기 위해 인재영입 등 당 혁신작업에 나섰다.

20대 총선을 앞두고서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 당 대표직까지 내려놓고 백의종군으로 전국을 누볐다. 국민의당과 주도권 경쟁을 벌이던 호남에서는 “호남에서 지지를 못 받으면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이처럼 문 후보가 정치적 고비마다 노 전 대통령 특유의 승부수를 띄워 돌파하자 ‘달라졌다’는 평가도 나오기 시작했다. 화법은 물론 얼굴인상까지 바뀌었다는 말도 듣는다. 문 후보도 스스로 “2012년 대선과 같은 점은, 아내가 우리 정숙씨라는 것 말고는 없다”고 강조한다.

특전사 부대에서 복무한 문재인 후보.
특전사 부대에서 복무한 문재인 후보.

<3막> 문재인 대세론

문 후보는 19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 대세론의 주인공이 됐다. 20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난파 위기의 민주당을 구하면서 유력한 대선후보로 자리매김한 그는 여야를 막론하고 가장 높은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고조된 정권교체 열망도 그의 대세론을 떠받치는 하나의 축이다.

하지만 그가 넘어야 할 산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문 후보 측에서 가장 껄끄러워하는 대목은 ‘분열의 리더십’ 평가다. 그는 “친노-비노 프레임을 깨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공언했으나 당 대표 시절 분당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안철수 후보에 이어 총선 때 영입했던 김종인 전 대표도 불화 끝에 탈당, 그와 반대 진영에 섰다. 친노에서 한솥밥을 먹은 안희정 충남지사는 경선 중 문 후보 측의 패권주의를 지적하며 그에게 “질리고 정 떨어진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문 후보는 국민통합 대통령이 되겠다고 호소하지만, 보수층은 물론이고 상당수 중도 진영은 그가 여전히 패권주의와 진영 논리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안 지사의 연정론에 대해 “분노가 없다”고 비판하거나, 반문연대, 비문연대를 “정권교체를 두려워하는 적폐연대”라고 폄하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패권주의 우려가 제기된다. 안보관 논란과 호남의 반문정서도 오랜 약점으로 꼽힌다.

문 후보가 현재로서는 청와대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후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역대 대선에서 대세론이 늘 당선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2012년 ‘박근혜 대세론’처럼 성공할지 아니면 2002년 ‘이회창 대세론’처럼 실패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5월 23일)에는 19대 대통령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려면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로 극명하게 갈린 대한민국을 다시 하나로 묶어내고 반문정서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다. 문재인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됐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부인 김정숙씨의 결혼식. 문재인 캠프 제공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부인 김정숙씨의 결혼식. 문재인 캠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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