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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가도 취업해도 팍팍한 삶… 욱~ 하는 청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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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가도 취업해도 팍팍한 삶… 욱~ 하는 청년 늘었다

입력
2015.03.1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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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 조절하는 전두엽 기능 저하, 20대 男 20%가 인격·행동장애

학교·가정서 인성교육 거의 못받아, 즉각적인 디지털 문화도 한몫

운동과 친구 대화 등으로 풀어야 "10초 호흡 고르면 조절 가능"

‘아무리 참으려 해도 화가 난다. 내가 생각해도 별 것 아닌 일인데, 이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 결국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졌다. 화를 내니 속은 후련한데 후회가 된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어렵게 취직했는데, 회사를 그만 둬야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

“업무를 빨리 처리하라”는 같은 팀 선배의 말에 ‘욱’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직장 1년 차 김모(28·남)씨 사례다. 최근 김씨처럼 사소한 일에 쉽게 분노하고, 방화, 도벽 등 이상 증상을 보이는 ‘인격ㆍ행동장애’로 고통 받는 20대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인격ㆍ행동장애 진단을 받은 인원은 1만3,000명으로 이중 20대가 전체 진료의 28%를 차지했다. 특히 20대 남성 진료인원은 최근 5년 간 계속 증가해 전체의 20.1%를 차지하고 있다. 20대 남성의 인격ㆍ행동장애 진료비율은 2010년 17.2%에서 지난해 20.1%로 5년 새 2.9%나 뛰었다. 환자 5명 중 1명이 20대 남성인 것이다.

왜 20대에서 인격ㆍ행동장애 질환이 증가할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대학만 졸업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취업난에 시달리고, 취업을 해도 경제적ㆍ사회적으로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강도형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어른들 말만 믿고 앞만 보고 달렸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자신이 꿈꿨던 미래를 보장받지 못해 분노와 허탈감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20대”라며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대학 진학은 물론 취업이 결정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것도 원인”이라고 했다.

사소한 일에 쉽게 분노하고 방화, 도벽 등 이상 증상을 보이는 인격ㆍ행동장애로 고통 받는 20대가 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꿈이 현실에서 좌절된 것이 한 원인”이라며 “성장기 인성교육이 전무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소한 일에 쉽게 분노하고 방화, 도벽 등 이상 증상을 보이는 인격ㆍ행동장애로 고통 받는 20대가 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꿈이 현실에서 좌절된 것이 한 원인”이라며 “성장기 인성교육이 전무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성교육 전무… 청소년기부터 충동조절 상실

인성교육이 배제된 교육시스템 때문에 청소년기 충동을 조절할 수 있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 기능이 떨어져 20대에 인격ㆍ행동장애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상규 한림대춘천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19세까지 충동을 조절하는 전전두엽이 발달하는데, 입학전쟁에 내몰린 우리 청소년들은 감정이나 충동을 자제하는 전전두엽 기능을 보강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며 “명문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모두 패배자가 되는 교육시스템 하에서 아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표한‘한국아동의 주관적 웰빙수준과 정책과제’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동들은 학업 스트레스 지수에서 50.5%를 기록해 조사대상 30개국 중 1위를 기록했다. 강 교수는 “어려서부터 부모나 교사들에게 잘한 일과 잘못한 일에 대해 각각 보상과 벌을 받는 등 인성교육이 이뤄져야 하지만 인성교육은 사라지고 오로지 성적으로 보상과 벌이 주어지기 때문에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돼야 하는 디지털 문화도 20대의 인격ㆍ행동장애 질환 증가에 한몫을 했다는 것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의 진단이다. 이상규 교수는 “모든 문제를 빨리, 즉각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요즘 젊은이들은 고통과 좌절에 반응을 일으키는 ‘역치(threshold)’가 낮다”며 “고통과 아픔을 참는 능력이 떨어져 사소한 일에 엄청난 분노와 폭력을 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정 내 양육도 문제다. 김의정 이대목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평소 부모가 화를 많이 내거나 폭력적이면 아이가 성장해 충동조절장애에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부모들은 한 번 아이들에게 화를 낸 것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부모가 습관적으로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하면 아이들은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쌓아둔다”며 “사회적ㆍ경제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이 가능한 나이가 되면 어릴 적부터 축적된 분노가 자신도 모르게 표출돼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강 교수는 “아이들은 자신이 닮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칭찬과 벌을 받으면서 감정을 조절하고 인내심을 배우는데, 과거에는 이런 인성교육을 아버지가 담당했지만 지금의 아버지들은 학원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 추락했다”며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의 인성을 함양할 존재가 사라진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핵가족화로 인한 과잉양육도 문제

지난해 연말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이 국내외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김 교수는 “조 전 부사장은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일 확률이 높다”며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과잉보호를 받고 성장해 사회에서 지위를 얻은 이들 중 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언, 폭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했다. 이수정 부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땅콩회항 당시 조 전 부사장이 와인을 마신 것으로 보도됐는데 술은 충동을 조절하는 전전두엽 기능을 마비시키는 대표적 물질”이라고 했다. 가뜩이나 충동조절능력이 약한데 술을 마셔 화를 참지 못했다는 것이다.

몸 쓰고 지인에게 속내 털어 놓으면 ‘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20대의 인격ㆍ행동장애를 감소시킬 방법은 없을까. 강 교수는 “화가 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화를 내지 않고 살라면 그것 또한 못할 일”이라며 “화도 잘 쓰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강 교수가 추천한 방법은 바로 ‘운동’. 강 교수는 “과거 어머니들은 부부싸움을 한 후 온갖 살림살이를 다 꺼내 대청소를 한 것처럼 화를 조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운동이나 스트레칭을 통해 화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속내를 밝혀도 탈이 없는 지인과의 대화도 효과적이다. 강 교수는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에게 속상했던 일이나 야속했던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것도 효과적”이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남을 욕한다고 핀잔 주지 말고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공감해 줘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감정조절 교육(emotion coaching)’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을 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성장해서 인격ㆍ행동장애에 노출되지 않는다”며 “아이가 반항한다고 무조건 제압하려고만 들지 말고, 아이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왜 힘들어하는지 소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정 교수는 “길어야 1분만 참으면 화가 가라앉을 수 있다”며 “화를 유발한 상대방과 떨어지는 등 환경을 바꾸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이상규 교수는 “증세에 따라 다르지만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 상담만 해도 상태가 호전될 수 있다”며 “화가 났을 때 5~10초 정도 숨을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면 화를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k.co.kr

[딸림박스] ‘화’ 잘 내면 뛰어난 소통도구

어찌 보면 우리는 매 순간 ‘화’ 내면서 살고 있다. 지하철이 늦게 와도 화 나고, 식당에서 밥이 늦어도 화가 난다. 각종 사회범죄, 국민을 무시한 지도층의 부정부패도 화를 돋군다. 그야말로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다.

대부분 화가 나면 화를 나게 한 상대방에게 폭언을 하게 된다. “너 때문이야” “당신이 뭔데 나를 이렇게 화가 나게 하나” “당신이 책임져” 등 대부분 화가 나면 상대방에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화가 날 때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면 오히려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조언한다.

강도형 교수는 “화가 나면 화를 일으킨 상대방을 욕하고 질책하는 것으로 화를 풀지만 좋지 못한 방법”이라며 “상대방이 아닌 나의 기준에서 왜 화가 났고 내 감정이 어떤지 설명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너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어떤 말이나 행위가 나의 감정을 자극해 화가 났는지 객관적으로 설명하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이기에 화를 잘 내는 것도 사회적 기술”이라며 “화가 난 이유를 상대방에 전가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소통하면 평생 안 볼 사람이 대화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화도 잘 내면 사람도 얻고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치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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