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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영혼의 정원에 물주는 방법

입력
2017.06.2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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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속하네요, 하늘이 정말 야속하네요! 경로당 앞에서 만난 마을 부녀회장 김간난 할머니는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숫제 탄식조로 중얼거리신다. 예년 같으면 지금이 장마철인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네요. 할머니는 방금 개울 건너에 있는 밭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사람 키보다 더 자랐어야 할 옥수수는 자라지도 못한 채 잎들이 배배 꼬이고, 파랗게 밭을 덮었어야 할 감자 이파리들은 노랗게 타 들어가더라고. 가뭄 속의 농작물처럼 타 들어가는 속내를 드러내어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이마 주름이 여느 때보다 훨씬 더 깊어 보였다.

회장님,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위로라도 해드려야 할 것 같아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진심이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하러 가요. 천주교 공소에! 일종의 기우제죠. 아 그래, 할머니는 독실한 신자지. 저수지로 가는 마을 언덕배기에 있는 공소를 향해 걸어가시는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며 가슴이 울컥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문명의 숱한 혜택을 누려온 우리 인간은 얼마나 오만한가. 어쩌면 하늘은 이런 재해를 통해 무작스런 인간의 오만을 꺾어놓으시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은 텃밭을 부쳐 먹는다. 주로 텃밭에 잡초를 기른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잡초가 자라도록 두고 거기 자란 잡초를 뜯어먹는 게으른 농사꾼인 셈. 물론 잡초는 다른 농작물보다는 생명력이 강해 물을 주며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편이지만, 올해는 그렇지 않다. 땡볕을 견디지 못한 잡초들도 오글쪼글 오가리가 들었다. 농부들이 뿌리째 뽑아 밭가에 팽개쳐놓아도 좀처럼 시들지 않는 쇠비름도 제대로 크지 못한 채 벌써 꽃을 피웠다. 이러면 다 시들어 죽겠다 싶어 해질녘이면 수돗물을 긴 호스로 끌어다 뿌려주곤 했다. 예년에 없던 일이다. 그렇게 물을 줄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우제를 올렸다. 기우제가 무엇인가. 하늘의 은총을 받고 싶다는 것 아닌가.

아빌라의 테레사 수녀는, 우리 영혼도 물을 줘야 하는 가뭄 속 정원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물을 주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첫째는 물통으로 직접 샘의 물을 길어다가 주는 것. 이건 매우 힘겨운 노동이다. 둘째는 양수기를 동원하여 물을 주는 것. 이건 힘이 조금 덜 드는 방법이다. 셋째는 시냇물의 물길을 돌려 정원으로 바로 끌어들이는 것인데, 이건 앞의 두 방법보다 훨씬 수월하다.

마지막 방법은, 하느님께서 비를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이므로, 정원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하늘이 내리시는 비를 기다리는 방법이다.

그런데 만일 하늘이 비를 내려주시지 않는다면? 그땐 정원의 화초가 말라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원사 스스로 물을 줘야 한다. 물론 힘겨운 노동이 필요하다. 이때 발생할 수 있는 영적인 위험은,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자아가 하느님의 인도를 앞서 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는 비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비는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하늘이 내려주시는 거니까. 그것은 선물이고 은총이니까.

그러므로 성숙한 신심을 지닌 사람은 ‘비에게 우선권을 주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즉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 앞에 오만한 자아를 비우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안에 보금자리를 치는 것’(마이스터 엑카르트)이다.

테레사 수녀가 가르치는 영혼의 정원에 물주는 방법 가운데 나 역시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올해는 절로 그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가뭄의 고통을 몸소 겪게 하심으로써 하늘이 나를 겸허하게 하신 것이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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