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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순실의 시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입력
2017.01.0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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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총리는 의전 때문에 여러 번 구설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변기에 집착했다면, 총리는 승용차에 집착하는 것 같다. 승용차를 KTX 플랫폼까지 끌고 가고, 버스를 쫓아낸 뒤 버스정류장에 차를 세우더니, 급기야 서민아파트를 방문해서는 차 때문에 경찰까지 출동했다. 변기와 뒷좌석에 집착하는 두 분의 행위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항문기에 고착된 심리를 떠올리면 무리일까. 꼼꼼하고 고집불통인.

재미있는 건 두 사람 모두 법치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법치에 대한 동서양의 개념은 많이 다르다. 보통 권리와 의무는 동시에 생긴다. 말하자면 맞지 않을 권리가 있으면 동시에 때리지 않을 의무도 있다. 그런데 동양 법치의 전통에선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왕은 사람을 죽여도 왕이라서 괜찮았다. 왕의 권리가 의무를 없앤 것이다. ‘형벌은 대부까지 올라가지 않는다(刑不上大夫)’는 예기(禮記)의 구절에서 동양 법치의 뿌리를 볼 수 있다. 동양에서 법치는 통치의 일환이어서 통치세력은 사실상 법 밖에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법치는 거꾸로 통치자의 권한을 제한한다. 고대 그리스는 제쳐 두고라도, 영국의 대헌장도 프랑스 인권선언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통치자에게서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그래서 서양 법치주의의 근간은 통치자가 권한을 행사할 때 준수할 법 절차에 있다. 삼권분립이 중요한 이유다. 동양과 서양의 법치는 법이 향하는 방향이 정반대다.

대한민국의 법체계는 서양에서 온 것인데, 집권자들은 이상하게 국민에게만 법치주의를 강요한다. 자기들은 블랙리스트며 간첩 조작이며 온갖 불법을 자행하면서. 그러니 우리 집권자들에게 법은 오로지 통치 수단일 뿐이다. 국민은 개돼지라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인류학자 베네딕트는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 연구에 착수한다. 의무(obligation)에 딱 맞는 일본어가 없어 고민하던 그는 은(恩)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자기에게 이익을 베푼 사람에게 일본인은 큰 책임감을 느끼는데, 이 채무가 ‘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은에서는 권리 의무 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일본은 한국을 침략했으니 사죄할 의무가 있지만, 일본인은 엉뚱하게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여 은을 갚으므로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우리 법치주의는 이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들어왔고, 그걸 판검사와 관료가 그대로 배워서 지금까지 써왔다. 이들은 법은 힘없는 사람만 지키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믿는다. 그래서 국민에게 법치주의를 강조하고, 국민이 자신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하면 잡아간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혼란스럽지만, 여기에 연루된 관료들에게 국민에 대한 의무는 애초에 없었다. 패악을 부리고도 법대로 하면 더 좋다던 최순실 가족. 총리는 이들보다 더 나을까. 하기야 헌법보다 대통령과의 의리가 먼저라는 국회의원이 활보하는 나라다. 자신들이 처리한 법 절차 자료를 폐기하고, 오히려 태블릿 PC의 확보 절차를 문제 삼아 죄를 덮으려는 것은 절차를 통해 통치자를 통제하려는 법의 정신을 송두리째 뒤엎는 발상이다. 박근혜와 법꾸라지들은 갑자기 순한 국민인 양, 동양의 법치에서 몸을 빼 서양의 법치 속으로 숨어버렸다.

우리는 법조인이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장악할 때의 위험성을 경험하는 중이다. 국정농단에 법조인이 끼면 얼마나 교활해지는지. 법의 독재(law autocracy)가 실현될까 두렵다. 법조인들은 헌법상 권리가 침해된다며 펄펄 뛰겠지만, 입법부와 행정부에 법조인의 진출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그게 싫다면, 우선 고위공직자수사처법이라도 처리하자. 힘 센 이들의 권리와 의무에 최소한의 균형은 맞아야 한다. 그래야만 공안검사 총리도 심리적 항문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2017년, 이 땅에 진정한 법치주의가 뿌리내리기를 기도한다.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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