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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홍대 앞 조형물 파괴와 표현의 자유

입력
2016.06.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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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정문에 설치된 조형물이 전시 이틀 만에 산산조각 났다. 졸지에 과제물을 파손당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공공성”이 있다고 항변했고, 같은 학교의 조소과 학과장과 전시를 담당했던 학과의 교수들은 “졸업을 준비하는 학생의 작품이 교내에서 편 가르기 식 흑백 논리에 희생됐다”라는 해명을 내어놓았다. 자신들의 위신을 지키고자 대중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교수들의 유체 이탈 화법은 세월호 참사를 막지 못했던 무능한 정부의 무책임 구조를 닮았다. 이 구조에 유명 미학자가 가세한다.

“어떤 대의를 위해서 남의 표현의 자유를 폭력적으로 짓밟아도 된다고 믿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작품을 만드는 작가보다, 저 작품에 계란 던지고 파괴한 사람들, 그리고 그 파괴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이라고 봐요. ‘해석’이라는 것의 ‘호의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에 따라야 합니다. 되도록 상대의 주장을 말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해 준 후에, 그래도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을 때, 그것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대의, 주의, 이념을 머리에 뒤집어쓴 사람들은 해석에 ‘악의의 원칙’을 적용합니다. 그래 놓고서 그것을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 아니 해석이 아니라 아예 팩트로 둔갑시켜 버리죠. 극단적 행동 앞에는 늘 이 해석적 독단이 존재합니다.”

진중권은 홍대 조형물 파괴 사건을 곧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법정으로 가져간다. 이 법정에서라면 나도 그의 우군이지만, 진중권이 너무 성급히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탓에 빠트린 게 있다. 바로 작가가 강변하기도 했던 ‘공공성’ 여부다. 한 학교의 정문에 세워질 만큼의 그 어떤 공공성이 이 작품에 있었던가. 조소과 학과장과 교수들은 “‘예술의 창의적 자유와 공공 미술로서의 공론적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마련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이 작품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현재 한국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넷우익 집단은 국정원과 모종의 연결을 가진 실체이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관념이 아니다.

지난 1일 서울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 설치된 극우성향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를 상징하는 손 모양의 동상이 파손된 모습 옆으로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 신재훈 인턴기자 (세종대 광전자공학과 4)
지난 1일 서울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 설치된 극우성향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를 상징하는 손 모양의 동상이 파손된 모습 옆으로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 신재훈 인턴기자 (세종대 광전자공학과 4)

1960년대 후반부터 계보를 만들기 시작한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은 처음부터 특정한 장소를 염두에 두고 구상된다. 특정 장소를 상정하고 제작된 장소 특정적 작품은 그 작품이 전시되는 장소의 역사나 정체성을 강화하거나 반대로 의미를 변환시키기도 한다. 때문에 강한 장소 특정적 함의를 가진 장소 특정적 작품은 원래의 자리를 떠나면 의미를 잃게 되는 수도 있다. 홍대 정문에 설치된 과제물은 물론 홍익대나 홍익대가 있는 지역을 특정하고 제작된 작품이 아니다. 하므로 졸업 과제물에 불과한 작품이 재학생의 항의를 사면서까지 거기 있어야 할 까닭도 없다.

진중권은 “저 작품이 마음에 안 들 때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그냥 ‘몰 취향하다’고 말하며 지나치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다. 일례로 1889년 에펠탑이 만들어졌을 때, 철골로 지어진 에펠탑을 견딜 수 없었던 모파상은 자주 에펠탑 안에 있던 식당에서 식사했다. 그곳이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온 미술은 저절로 공공 미술(Public Art)이 된다. 화랑에서 이루어지는 전시가 아닌 공공장소의 설치물은 작가가 원치 않더라도 그 장소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게 되며, 그 결과 그 장소의 구성원이나 주민들이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설치물에 반발하게 되는 사태는 연쇄적이다. 최근에 출간된 ‘한국 디자인의 문명과 야만’(안그라픽스,2016)에서 최범이 “공공 미술이 성립하기 위한 최종적인 근거로 공동체의 동의를 요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없으면 예술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은이는 한국 미술 교육이 사적 미술에만 치우쳐 있어 공공 미술에 관한 이해와 경험이 부족하다면서 “주민도 문제이지만 작가도 문제”라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작품이 파괴된 것은 안타깝다. 그러기 전에 국정원이나 청와대 정문으로 미리 옮겼어야 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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