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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해시계도 내 연구로 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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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해시계도 내 연구로 햇빛"

입력
2017.01.1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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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원 전남대 교수와 만나 대담 중인, 한국 과학사의 산증인 전상운 교수. 사이언스북스 제공
신동원 전남대 교수와 만나 대담 중인, 한국 과학사의 산증인 전상운 교수. 사이언스북스 제공

“선생님의 인생은 모두 과학사와 엮이는 군요.”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최근 자신과 대담한 전상운(85) 전 성신여대 총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저 선배 학자에게 건네는 형식적 표현이 아니었다. 전 전 총장은 한국 과학 문화재의 개척자이자 과학사의 산 증인이다. 750쪽이 넘는 신간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사이언스북스)는 그의 60년 외길 연구 인생을 증명한다. 신 교수의 말대로 “그(전상운)의 인생의 모든 길은 한국 과학사 통사의 집필과 완성으로 향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나 “사학과 강의를 도강”하곤 했던 전 전 총장은 1960년 무렵 본격적으로 과학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자연과학과 기술의 역사’로 정의되는 과학사는 당시 낯선 학문이었다. 국내에서 가르침 받을 교수도 읽을 책도 구하기 어려웠다. 연구자 스스로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너무나 생소한 분야였다.

“그저 좋아서” 연구를 한 그가 펴낸 ‘한국과학기술사’(1966)는 한국 과학사 연구의 지평을 열었다. 청동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를 통사로 서술하며 국내외 학계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한국 과학사를 종합했다는 평을 받았다.

전 전 총장 덕분에 잊힐 뻔했던 수많은 유물들이 과학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문화재 위원으로 활동하며 ‘천상열차분야지도’ ‘혼천시계’ 등 15개 유물을 국보ㆍ보물로 지정하는 데 앞장섰다. 1952년 첨성대가 신라 천문대로서 국보 지정된 이후 처음으로 과학기술 유물의 중요성이 공식 인정됐다.

전 전 총장은 신 교수와의 대담에서 “나는 내가 연구하지 않은 분야는 내 책에 담지 않았다”고 밝혔다. 자신이 직접 유물을 찾고 연구한 결과만 저서에 싣기를 고집했던 학자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집사람과 둘이서 방학 때면 버스 타고 전국을 돌았죠. 전국을 거의 다 돌았어요. 실제로 제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했죠. 그렇게 본 것들은 머릿속에 컴퓨터 입력되듯이 입력됐죠. 절대 잊지 않았어요, 옛날 이야기지만.”

연구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도 털어놓는다. “부산 동아대 박물관에 해시계가 있다고 해서 갔죠. 그런데 그 해시계가 휴대용 해시계인 거에요. 휴대용 해시계라고 고증해줬죠. 그때 관장하던 분이, ‘선생님 덕분에 이 해시계가 어떤 유물인지 알았습니다’ 하더군요.” 전시는커녕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서울대박물관)한쪽 구석 장롱 문을 여니 앙구일부가 들어있고, 서가 책들 사이에 자명종이 끼어 있는” 상황에서 과학사 연구자로서 전 전 총장의 역할은 컸다.

국내 과학사를 세계에 알리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영어판 ‘한국 과학기술사’(1974)는 “한국 과학사를 포괄하는 동시에 국제 학계에서도 통용되는 책을 내고 싶다”는 의지의 결과물이었다. 일본어판 ‘한국 과학기술사’(1978)는 일본 유학 당시 받은 자극으로 “서문을 쓰는 데 책 쓰는 시간의 절반 정도를 바쳤다”고도 밝혔다.

혹자는 그의 연구를 두고 ‘사상사적인 게 없다’ ‘사회학적인 게 없다’ 하고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전 전 총장은 “(예전에는)민족주의자로 비치는 게 싫어 누가 나를 민족주의자라고 하면 불쾌했는데,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며 의연한 모습이다.

그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에게도 나름의 창조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민족이 남긴 과학적 성과를 그냥 나열만 하지 않고 구체적인 설명 없이 무조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에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지나친 과소 평가나 부질없는 자랑을 듣기엔 그만 멀미가 난 지 오래다. 우리 마음 속에 도사리고 앉은 비굴한 사대주의와 오만한 과대망상증을 떨어 버리고 스스로를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

노학자는 자신의 60년 연구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긴 나그넷길이었다. 그 길목에서 나는 여러 번 주저 앉고 눈물을 삼켜야 했고 외로움에 지치곤 했다… 나는 아직도 과학사의 길목에 서 있다. 인생의 지평선이 보이지만, 커다란 짐을 내려놓고 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도 이제 쉬면서 가야겠다.”

스스로가 한국 과학사의 일부가 된 노학자는 덧붙인다. “나름 한국 과학사 분야에서 신작로를 닦는다고 닦아 봤어요. 후학들이 이 길로 따라올지 말지는 알아서들 결정하겠죠.”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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