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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재 화백“6ㆍ25때 포로수용소서 은사 만나…그림은 나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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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재 화백“6ㆍ25때 포로수용소서 은사 만나…그림은 나의 숙명”

입력
2017.06.1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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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입학 후 몇 달 안돼 전쟁 나

빨치산 입단, 지리산 등지서 활동

이낙연 총리 배우자의 고교 은사

“그림 값 논란 보며 안타까워”

구순 앞둔 나이에도 붓과 씨름

“심장을 울릴 걸작 남기고 싶어”

한국 서양화가 원로 박남재(88) 화백이 전북 순창군 적성면 구암마을의 ‘섬진강미술관’ 작업실에서 작품활동 중에 활짝 웃고 있다. 박남재 화백 제공
한국 서양화가 원로 박남재(88) 화백이 전북 순창군 적성면 구암마을의 ‘섬진강미술관’ 작업실에서 작품활동 중에 활짝 웃고 있다. 박남재 화백 제공

“숙희는 얌전하고 성실한 학생이었지. 지난번 총리 청문회 때 그림 값 논란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구. 숙희 그림이 그 이상은 되는데...” 전북 순창 출신으로 한국 서양화가 원로인 박남재(88) 화백은 이낙연 총리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부인 김숙희 여사의 그림 값 논란이 불거지자 40여 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전주여고 미술반에서 2년간 김숙희 여사를 가르쳤던 박 화백은 김 여사가 대학진학을 앞두고 고민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당시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숙희가 대학진학을 앞두고 이화여대 미대를 희망했지만 담임교사는 ‘합격이 어려워 한 단계 낮춰 지원하라’며 원서를 써주지 않았는데 내가 나서 ‘숙희의 그림 실력이면 붙을 것’이라고 숙희와 부모에게 권유해 이대에 합격했다”고 소개했다.

박 화백과 김 여사의 사제관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김 여사는 친구들과 함께 지난 3월에도 순창으로 박 화백을 찾아 왔다. 김 여사는 당시 “90세 가까운 연세에도 붓을 놓지 않고 작품을 하시는 스승님의 치열한 예술혼과 열정이 존경스럽다. ‘예술가는 돈에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긴다”고 주변에 털어놨다.

박 화백은 “숙희랑 그 친구들이 종종 찾아오면 ‘재능은 오래가지 못한다. 우직하고 성실하게 혼을 쏟아 부어야 생명력 있는 작품이 나온다. 그림을 좀 못 그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제자들에게 강조한다”고 했다.

박 화백은 빨치산 출신으로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다. 1929년 순창읍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4학년(당시 중학교는 6년제)까지 고향에 살다 서울로 전학을 갔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들어갔지만 입학 몇 달 만에 한국전쟁이 나면서 학업을 중도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빨치산 대장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에 들어가 1년간 회문산과 지리산ㆍ운장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총격전 때 총알을 맞았지만 어깨 아래를 관통해 팔이 떨어지지 않은 것도 그렇고, 국군에 붙잡혀 끌려간 광주포로수용소에서 서양화가 오지호 화백을 만난 인연도 그렇고 그림이 운명이었던 같다”고 회고했다. 오 화백의 지도로 조선대 미술학과를 졸업했고 전주여고ㆍ전주고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원광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미대 학장을 지냈다.

박 화백은 ‘대담한 원색의 붓질로 자연의 강렬한 리얼리티를 포착해 독창적인 색감과 표현력으로 구상화의 길을 개척해 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표작으로 ‘붉은 월출산’ ‘용진 하늘’ 등 작품이 있다.

박 화백은 그 동안 전주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다 70여 년 만에 고향인 순창으로 최근 귀향 했다. “순창이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고향에 돌아와 큰 나무가 돼 달라”는 황숙주 순창군수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난해 12월부터 순창 ‘섬진강미술관’ 명예관장을 맡으면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작품에 열정을 쏟고 있다.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캔버스 앞에서 종일 붓과 씨름한다. 최근 새 작품을 위해 200~300호 대작 캔버스를 10개나 구입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박 화백은 “세상 사람들의 심장을 ‘쿵’하게 울릴 수 있는 걸작을 남기고 싶다”며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작업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순창=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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