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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궁형 치욕에 스스로 처형의 길 택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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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궁형 치욕에 스스로 처형의 길 택했을 것”

입력
2016.03.3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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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마천.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마천이라면 마흔 아홉의 나이에 치욕적 궁형을 택했고, 그럼에도 끝내 ‘사기’를 완성시킨 뚝심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사마천의 최후는 어땠을까. 1998년 이후 꾸준히 사마천의 고향 중국 섬서성 한성시 서촌을 드나들며 ‘사기’ 완역 작업을 진행 중인 김영수 전 교수는 사마천이 다시 한무제를 도발해 사형당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창해출판)을 통해서다.

역사 서술의 전범으로 꼽히는 ‘사기’의 또 다른 측면은 ‘뒷끝 작렬’이다. 책의 구성, 인물 해석, 서술 전략 등에서 궁형을 내린 한무제에 대한 비판을 곳곳에 숨겨뒀다. 가령, 한무제를 다룬 ‘효무본기’는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 ‘봉선제’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얼핏 보면 황제의 위용을 뽐낸 일을 사실대로 적어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당신이 54년 동안 황제로서 한 일이라곤 황제라 뻐기면서 제사를 여러 번 치른 것 뿐이다’라는 통렬한 조롱으로도 읽힐 수 있다. 흔히 ‘문학적’이란 말로 표현되는 사기 서술의 참 맛은 이런 데 숨어 있다. 사마천이 끝내 처형을 유도해냈을 것이라는 추론은 이런 태도와 관련 있다.

사마천이 한무제에 다시 도전해 처형을 유도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김영수 전 교수.
사마천이 한무제에 다시 도전해 처형을 유도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김영수 전 교수.

사마천의 고향을 다시 다녀온 김 전 교수를 최근 전화로 인터뷰했다.

-사마천의 최후에 대해선 널리 알려진 바가 없다.

“그 부분은 기록이 명확치 않아 정확히 정해진 게 없다.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은 자연사한 게 아닌가 하는 정도다.”

-자신이 처형당하도록 유도했다는 주장인데.

“사마천은 사형 대신 궁형을 택해 살아남은 인물이다. 궁형이란 치욕을 당한 뒤 육체는 잠시 빌렸을 뿐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사기’를 완성함으로써 사마천은 후대에 전할 자신의 목소리를 남겼다. 그 뒤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를 모욕한 한무제에게 ‘이제 내 몸뚱이까지 너가 거두어가라’ 하지 않았을까. 그게 가장 사마천다운 선택이라 생각한다.”

-근거가 있는지.

“예전에도 처형당했을 것이라 생각한 이들은 있었다. 몇몇 옛 기록에는 처형이라 추측할 만한 대목도 있다. 거기다 사기 자체를 읽어봐도 진하게 배어 있는 복수 관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기에 자살 관련 기록이 200여 곳에 이르는데 주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에 대한 얘기들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자신의 죽음이 어떤 방식이어야 할 지를 두고 골똘히 생각하지 않았을까. 거기에다 사마천의 후손들도 처형당했다 믿고 있다.”

-후손들이 처형당했다고 믿는 근거는.

“사마천의 후손들은 성을 잃었다. 후손들은 성의 두 글자 사(司)와 마(馬)를 한 글자씩 나눠가진 뒤 성을 고스란히 쓸 수 없으니 획을 덧대어 동(同)씨, 풍(馮)씨로 집안을 보존했다. 이런 방식을 써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궁형을 받았다 해도 자연사였다면 그럴 필요까진 없다. 역적의 집안이어야 논리적 설명이 가능하다.”

-후손들의 일방 주장일 가능성은 없을까.

“이번 1권에서는 그 얘기를 약간만 던져 둔 것이다. 3권에서 사마천의 고향인 섬서성 서촌에 대한 현지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제대로 밝혀볼 생각이다.”

-사마천 후손들과의 인연이 궁금하다.

“1999년 여름이었다. 사마천의 고향을 두 번째 찾았을 때다. 섬서성은 원래 비가 적은 곳인데 그 해 물난리가 났다. 그 때만 해도 사마천을 크게 기리지 않았으니 유적으로 가는 길이 곧 끊겼다. 마침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는데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자기가 동씨로 사마천의 17대손이라 했다. 먼 한국에서 관심을 가져줬다는 점 때문에 무척 고마워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사마천은 기원전 인물인데 17대손은 이상하다.

“안 그래도 71대손을 잘 못 말한 거 아니냐 했더니, 사마천이 처형당한 뒤 역적 집안이 되는 바람에 족보를 못 만들어서 그리 된 거라는 설명이었다. 사마천 사후 성씨를 바꿔서 집성촌 형태로 살면서 엄혹한 감시를 받았다 한다. 그게 풀린 게 명나라 때였고 그 때쯤을 중시조 삼아 족보를 만들어서 17대가 됐다는 얘기다.”

-절대 권력자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사마천이라면, 지금의 중국이 사마천을 갑자기 띄우는 것이 좀 이상하다.

“시진핑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중국은 2010년 되어서야 사마천과 사기를 크게 키우고 있다. 황제, 공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제사로 사마천에 대한 제사를 꼽을 정도다. 난 그게 자신감이라 본다. 이제 권력에 대한 비판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경제적 기초를 다졌고 정치적 리더십에서도 자신감이 생겼다는 의미다. 그리고 독서광으로 유명한 시진핑 스스로가 사기의 팬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문학적인 역사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사마천에 대한 비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말씀대로 역사를 문학처럼 썼다는 얘기다. 내 주장을 하자면 나는 ‘나약한 객관성보다 확실한 주관성이 낫다’는 쪽이다. 나 스스로도 공부할 때 논문을 소설처럼 썼다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떻게 보면 2004년 어렵게 얻은 교수직도 걷어차고 지금까지 사마천에게만 매달리게 된 것도 그 경험 때문일 지 모르겠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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