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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사랑한 ‘르네상스맨’ 움베르토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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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사랑한 ‘르네상스맨’ 움베르토 에코

입력
2016.02.2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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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별세한 움베르토 에코는 유머를 신봉하는 지성이었다. 쓰지 못했지만 썼으면 하고 열렬하게 바랐던 책으로 “희극에 대한 이론서”를 꼽은 그는 “희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향한 인간만의 본질적 반응”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마지막 소설 '0번(Numero Zero)'의 출간에 맞춰 파리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파리=AFP연합뉴스
19일 별세한 움베르토 에코는 유머를 신봉하는 지성이었다. 쓰지 못했지만 썼으면 하고 열렬하게 바랐던 책으로 “희극에 대한 이론서”를 꼽은 그는 “희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향한 인간만의 본질적 반응”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마지막 소설 '0번(Numero Zero)'의 출간에 맞춰 파리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파리=AFP연합뉴스

‘중세학자, 철학자, 기호학자, 언어학자, 문학비평가, 소설가. 르네상스맨은 아님’.

19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직접 쓴 소개 문구다. 인문학의 전방위를 맹렬하게 가로지르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후 최고의 르네상스맨으로 불려온 에코의 유머러스한 단면이 엿보이는 글귀다. ‘장미의 이름’의 소설가로, ‘기호학이론’의 기호학자로, 지식의 가장 넓고 깊은 지대를 종횡무진하며 학계와 대중 모두에게서 사랑 받았던 그의 부음은 생전 광대했던 횡보만큼이나 넓고 깊은 애도의 자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밀라노 자택에서 암으로 숨진 에코는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주 소도시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책을 좋아했지만 책 살 돈은 없었던 소시민 가정에서 자란 에코는 법학을 공부하라는 회계사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고 토리노대학에서 중세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강의하던 10여 년간 방송사의 문화에디터로 일하기도 했다. 단어, 종교성상(聖像), 의복, 악보 등의 기표와 상징을 통해 문화를 해석하는 학문인 기호학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1975년 유럽 최고(最古) 대학인 볼로냐대학의 기호학 교수가 되었고,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기호학 분야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 ‘기호학이론’, ‘열린 예술작품’뿐 아니라 역사를 통해 사람들의 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밝혀낸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 등이 학술 분야의 대표작이다.

이탈리아 신문과 잡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칼럼니스트로서 국내에서도 널리 읽힌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같은 에세이를 내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 ‘궁극의 리스트’ 같은 인문서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 같은 대중문화 분석서, ‘논문 잘 쓰는 방법’과 같은 실용서까지 저서의 범위는 광활하다.

저명한 기호학자였던 에코를 순식간에 세계적 슈퍼스타로 만든 사건은 그가 48세에 쓴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비극론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음모에 의해 말소된 ‘희극’편이 있었으리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장미의 이름’은 14세기 중세 이탈리아 수도원을 배경으로 잇단 독살사건을 파헤치는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셜록 홈즈 스타일의 탐정 미스터리로 쓴 작품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달라는 방송사 친구의 제안으로 구상에 들어가 집필 두 달 만에 탈고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히트해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소설은 40여개 언어로 번역돼 3,000만부 넘게 팔렸다.

소설가로의 돌연한 변신으로 학계를 놀라게 했지만 에코는 “항상 서사 충동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0세 무렵부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그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논문을 써도 언제나 ‘누가 무엇을 했다’의 이야기 형식으로 썼다. 단지 다른 스타일로 해왔을 뿐 항상 이야기를 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은 이야기해야 한다”는 에코의 신념에 따라 소설은 그의 기호학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론이 됐으며, 20여권의 책으로 응축된 그의 기호학적 관심은 총 7권의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지만 에코가 항상 학계와 문학계의 열렬한 지지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정반대로 학자적 진지함과 소설가적 재능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을 양쪽 모두에서 받기도 했다. ‘장미의 이름’ 이후 펴낸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같은 소설들은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했지만, 평단에서는 첫 소설처럼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탄이 나오지 않았다. “엄청난 분량에 어려운 개념들로 가득하지만 독자들은 열광하고, 평론가들은 폄하하는 소설”이라는 식의 비판이 반복됐다. 살만 루시디가 ‘푸코의 진자’를 두고 “유머도 없고, 캐릭터도 죽어있고, 그럴듯한 구어를 흉내도 못 낸, 온갖 공문서에나 나올 법한 까다로운 표현들로 가득한 너무나 지루한 작품”이라고 혹평한 것이 대표적이다. 리처드 번슈타인도 2000년 뉴욕타임스에 쓴 ‘바우돌리노’ 리뷰에서 “에코처럼 솜씨 좋은 스토리텔러가 어째서 이렇게 정형화되고 난삽한 소설을 쓰게 됐는지 독자들은 궁금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미의 이름’은 족쇄와도 같아서 에코 스스로도 “신작을 펴낼 때마다 ‘장미의 이름’이 더 팔린다. 페이퍼백이니까. ‘장미의 이름’을 증오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에코가 거둔 대중적 성공은 그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작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것이었다. 에코는 평생토록 “당신 소설은 이렇게 어려운데 어떻게 그런 성공을 거둔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 질문을 매우 싫어했다. 과도한 박식이 주는 매력은 “독자 자신이 스스로의 무지에 수치심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며, 그 수치심이 에코의 화려함에 대한 순진한 존경심으로 바뀌는 것”이라는 극언까지 들었다. 이에 대해 에코는 “그건 어떤 미인에게 ‘어떻게 남자들한테 그렇게 관심을 받을 수 있죠’라고 묻는 것과 같다”며 “대중들이 단순한 것을 원한다고 믿는 건 출판업자와 기자들뿐이다. 사람들은 단순한 것에 질렸다. 도전 받기를 원한다”고 답했다. 실제 “매우 평이한 언어로 전혀 박식하지 않게 쓴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 에코의 소설 중 가장 조금 팔린 소설이기도 하다.

지식의 최전선에서뿐 아니라 대중문화계에서도 세계적 슈퍼스타였던 에코는 그 이중적 위상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학자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에코 자신은 그런 이중지위에 별다른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호머와 월트 디즈니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고 말하곤 했다. 볼로냐의 선술집에서 밤이면 학생들과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 받으며 와인을 마시던 에코는 “나는 나 자신을 진지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철학자”라고 말한 바 있다.

로마 가톨릭 신자로 나고 자란 에코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신앙의 갈등을 겪으며 가톨릭과 결별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종교는 믿는다”고 말해온 그의 종교는 아마도 유머였을지 모른다. 평생 쾌활한 유머와 낙천적 활력으로 왕성한 글쓰기를 해온 에코는 “쓰지 못했지만 썼으면 하고 열렬하게 바랐던 책을 딱 한 권만 꼽아달라”는 파리 리뷰의 질문에 “희극에 대한 이론서를 쓰는 걸 꿈꿨다”고 답했다. “희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향한 인간만의 본질적 반응”이라며 이 이론을 만들 수 없어 ‘장미의 이름’을 썼다는 것이다. 유머가 사탄의 도구라고 믿었던 중세, ‘희극론’을 찾아 나선 수사들의 모험을 그린 ‘장미의 이름’은 그 자체로 웃음의 역할을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문학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 후기에 “나는 모든 곳에서 중세 시기를 본다. 그 시기는 중세적이지만 중세적으로 보이지 않는 내 일상의 관심사에 투명하게 덮여 있다”고 썼다. 훗날 그 의미를 묻는 파리 리뷰의 질문에 에코는 “중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반대이기 때문에 끌린다. 중세는 암흑시대가 아니라 찬란하게 빛나는 시대였고, 그 시대의 비옥한 토양에서 르네상스가 출현했다”고 답했다. 그야말로 중세를 사랑한 르네상스맨이었다.

소설에 성적 묘사가 너무 적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쓰는 것보다 하는 걸 더 좋아하니까”라고 유쾌하게 답했던 이 지식의 거장은 라틴어를 비롯한 10여 개 언어에 능통한 언어천재이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이 번역되는 과정에 일일이 개입하고 감수하며 번역가들을 질리게 했던 그는 ‘장미의 이름’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번역한다는 것’이라는 책으로 남기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작고한 이윤기씨가 1986년 ‘장미의 이름’을 첫 번역한 후 1992년 500개의 각주를 단 개역판을 냈고, 2000년 철학박사 강유원씨의 지적을 수용해 260군데의 오역을 바로 잡은 세 번째 개정판을 선보였다.

에코는 2011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소설가와 학자 중 어떤 것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판단은 후대에 남겨두겠다”며 “나의 모든 소설은 학문과 서로 연결돼 있다”고 답했다. 가디언의 표현처럼 “ ‘장미의 이름’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과 기호학과 언어철학은 세계적 판매고가 다를 뿐 모두 움베르토 에코라는 퍼즐을 이루는 조각들”이다.

에코가 지난해 펴낸 마지막 소설 ‘0번(Numero Zero)’은 무솔리니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 베를루스코니 체제를 낳은 미디어 정치와 언론의 음모를 다룬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올 여름 열린책들에서 번역돼 나온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 왼쪽부터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프라하의 묘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 왼쪽부터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프라하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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