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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개탄스러운 트럼프 지지자들

입력
2016.10.0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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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는 최근 경쟁자인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개탄스러운 집단(basket of deplorable)’이라고 표현했다. 재치가 있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어휘 선택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발언을 사과했다. 하지만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트럼프는 특히 인종에 관한 관점이 정말로 개탄스러운 지지자를 많이 끌어모았다.

문제는 이처럼 개탄스러운 유권자들 상당수가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은 이들이란 점이다. 이 때문에 클린턴의 발언은 그를 속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에는 상대적으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선진국들 가운데 미국은 읽고 쓰기 능력, 일반상식, 과학 분야에 있어서 하위권에 있다. 반면 한국, 일본, 네덜란드, 캐나다, 러시아는 모든 영역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교육의 너무 많은 부분을 시장에 맡겨 놓았다는 점이 조금은 원인이 됐을 것이다. 돈이 많은 이들은 고등 교육을 받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다.

아직 클린턴이 고학력 도시 유권자들의 마음을 끌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반면 트럼프는 주로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들을 끌어당긴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이전 세대에 살았다면 민주당에 투표하는 광부나 생산직 노동자였을 사람들이다. 교육 수준과 위험한 선동정치가의 호소력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뜻일까.

트럼프의 가장 놀라운 점 중 하나는 고학력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무식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무지를 과시하면서 큰 이득을 보고 있는 듯한 것 또한 그렇다. 요란한 무식쟁이가 세상에 대한 지식이 자신만큼이나 얄팍한 수많은 사람을 이해시키기는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건 포퓰리스트 선동가의 말에는 실제적 진실이 조금이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많은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성적인 논쟁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그건 진보적인 속물들을 위한 것이다. 그보다는 감정이 더 중요하다. 미국이든 다른 어떤 나라든 선동정치가가 조종하려고 하는 감정은 공포와 분노, 불신이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초기 나치당은 학력이 매우 낮은 사람들에게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독일은 대체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다. 가장 열성적인 나치 당원 중에는 지역의 작은 사업가와 사무직 노동자, 농부는 물론 교사, 엔지니어, 의사도 있었다. 대체로 도시의 공장 노동자와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는 고학력 개신교도에 비해 히틀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정도가 덜했다. 그러니 저학력과 히틀러의 지지율 상승을 연결해 설명하기는 어렵다.

전쟁 패배의 수모를 겪은 뒤 황폐한 경제 침체의 한가운데 있던 바이마르 독일에서는 공포와 분노,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 선전이 자극한 인종 혐오는 오늘날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달랐다. 유대인은 은행가, 교수, 변호사, 언론사와 연예계 종사자 등 상류층 직업군을 지배하는 사악한 세력으로 비쳤다. 독일이 부흥하지 못하도록 등 뒤에서 칼로 찌르는 존재들로 여겼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월스트리트 은행가, 주류 언론, 워싱턴 내부자들 등 상류층을 상징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외국인 혐오증은 가난한 멕시코 이민자들, 흑인들, 중동 난민들을 정면으로 겨눈다. 그들은 선량한(이라고 쓰고 ‘백인’이라고 읽는) 미국인이 사회적 서열에서 응당 차지해야 할 자리를 빼앗는 무임승차자 취급을 받는다. 세계화되고 점점 다문화 사회가 돼가는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혜택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더 불우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선 바이마르공화국처럼 분노에 차 있는 사람들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현재의 지배적인 정치ㆍ경제 제도를 불신한다. 그래서 이를 무너뜨리겠다고 약속하는 지도자를 따른다. 안정적인 것들을 몰아내서 미국이 다시 위대해지길 바란다. 히틀러가 지배하던 독일에선 상류층이든 평민이든 모든 계층이 이런 희망을 품었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로 출마한 미국에선 이런 희망이 대체로 평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부유하고 고학력인 유권자들은 오늘날의 세계를 그다지 무섭게 느끼지 않는다. 열린 국경과 값싼 이주 노동력, 정보기술, 문화적 영향의 풍요로운 조화에서 그들은 이득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이민자와 소수민족은 자신들을 겨냥한 포퓰리스트의 반란에 동조할 생각이 없다. 그들이 클린턴에게 투표하려는 이유다.

트럼프는 그래서 자신이 뒤처지고 있다고 느끼며 불만에 차 있는 백인 미국인들에게 기대야 한다. 꽤 많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토록 부적절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미국 사회를 비난하며 공격하고 있는 거로 풀이된다. 이것은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학력자들이 선동정치에 면역이 돼 있어서가 아니다. 망가진 교육 제도가 많은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저학력 유권자들도 나쁘지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제조업 일자리가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다. 후기산업화 사회에서 그런 일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지금, 너무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느끼고 있다. 고집불통의 선동정치가에게 나라를 맡기게 되면 그 나라뿐만 아니라 점점 위험해지는 세계에서 자국의 자유를 지키려 애쓰고 있는 다른 모든 나라에도 엄청난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많은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특히 미국에서 더 심각하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번역=고경석 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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