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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 "회사, 내가 가고 싶을 때 간다" 독일 개인 맞춤형 근무 실험중

입력
2017.06.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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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학업체 바스프 자율근로시간제

출퇴근 각각 2시간씩 미루거나

요일 별 다른 시간에 노동 가능

효율과 집중도 훨씬 높아져

#2

AI와 함께 일할 시대 대비

4차 산업혁명 근로 형태 마련

노동자들 더 잘게 쪼개 일할 것

다양한 파트타임 모델 등 예고

출근 시간이 유연한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오전 8시 풍경은 한국보다 한결 여유롭다. 프랑크푸르트=박재현 기자
출근 시간이 유연한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오전 8시 풍경은 한국보다 한결 여유롭다. 프랑크푸르트=박재현 기자

12일 오후 2시 독일 루드비히샤펜에 위치한 세계 최대 화학업체 바스프(BASF) 사무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지만 직원들이 모두 모여 일하는 사무실은 전체 120여개 사무실 중 3분의 2 정도에 불과했다. 아예 비어 있거나 고작 한두 명만 앉아 일하는 사무실도 있었다. 회사 안에 있는 카페나 공원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는 직원도 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소위 ‘땡땡이’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직원 각자의 계획대로 자신의 근로시간을 조절하는 자율근로시간제를 운영하고 있는 현장이다.

바스프의 자율근로시간제는 근로자가 각자 계약된 근로시간 내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정해 일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출ㆍ퇴근을 각각 2시간씩 미루거나 점심시간을 길게 갖거나 요일에 따라 다른 시간에 일하는 것 등이 모두 가능하다. 바스프에서 7년째 근무하고 있는 조예진(29) 과장은 “직원들은 ‘신뢰근로시간(Trust working time)’이라고 부르는데, 본인이 하루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직접 계획을 세우고 근로시간을 짜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업무를 하는 것보다 효율과 집중도가 훨씬 높다”고 말했다.

피터 캐머허 BMW 종업원협의회 대변인이 자동차 생산공장의 1년 근무표를 놓고 직원들이개인 사정에 따라 근무를 어떻게 조정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뮌헨=박재현 기자
피터 캐머허 BMW 종업원협의회 대변인이 자동차 생산공장의 1년 근무표를 놓고 직원들이개인 사정에 따라 근무를 어떻게 조정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뮌헨=박재현 기자

AI와 함께 일하는 근무제 연구 중

바스프는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기 위해 2009년 근로시간조정부(Time management department)를 만들어 다양한 형태의 근무제를 실험하고 있다. 2013년까지는 바스프 루드비히샤펜 공장을 대상으로 자동화 공정에 가장 생산적인 근무형태와 근로시간이 무엇인지를 연구했고, 이제는 인공지능(AI)과 함께 일할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율리크 플렉 근로시간조정부장은 “6주 뒤의 경제상황을 예측해 매주 근로시간을 바꾸는 모델, 여름휴가 기간 공장 직원들을 한꺼번에 장기 휴가를 보내고 방학을 맞은 학생 등 임시 파트타임 인력을 채용해 공장을 가동하는 모델 등을 시험 중”이라고 밝혔다. 근로시간조정부가 개발한 새로운 근무제는 먼저 한 공장에서 시범운영을 해 보고 성과가 있으면 그 지역 공장 전체, 다시 전 세계 모든 공장으로 확대 시행한다. 플렉 부장은 “미래에는 공장의 일률적인 교대제도 팀장 관리 하에 개개인이 자유롭게 근로시간을 조정하는 식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직원들은 원하는 시간에 출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보적인 개인 맞춤형 교대근무를 우선 실현한 공장도 있다. 주ㆍ야 12시간씩 교대제로 운영되는 바스프의 한 화학공장에 개인 상황에 따라 낮 근무만 하는 팀을 두는 ‘상황 맞춤형 교대제’를 도입했다. 플렉 근로시간조정부장은 “육아ㆍ건강ㆍ노령 등으로 밤 근무가 어려운 직원들의 호응이 크다”고 말했다. 건강이 호전되거나 아이가 크면 다시 밤 근무팀으로 이동한다.

근로시간 가장 짧고 유연한 나라

독일은 1995년 산업 전체 평균 주 38.5시간, 금속ㆍ철강ㆍ전기산업의 경우 주 35시간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연간 1,368시간)다. 지금 한국에서 이나마 제대로 지키자고 하는 주당 40시간 근로는 1967년부터 시행했다. 경제 사정과 회사 상황에 따라 근로시간을 주 28시간에서 40시간까지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고, 초과근무를 저축했다가 원할 때 꺼내 쓰는 근로시간 계좌제가 일반화돼 있다. 이미 근로시간 단축과 유연 근무제가 깊이 뿌리를 내린 만큼 이제 초점은 근로자 개개인에게 특화된 맞춤형 근무다.

금속노조가 도전하는 새로운 과제도 이것이다. 13일 오전 프랑크푸르트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요한 카를로스 리오 안타스 금속노조 임금정책부장은 “내년 사용자연합과의 협상 목표는 근로시간 단축이 아닌 ‘개인별 맞춤 근로시간’”이라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근무제가 유연한 나라인 독일에서도 공장 생산직만큼은 톱니바퀴처럼 딱딱 이가 맞는 교대제로 돌아가지만, 바스프의 사례에서 보듯 직원 개인의 사정을 반영한 교대제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안타스 부장은 “금속노조가 추진하는 근로시간 모델은 하루 평균 8시간 일률적으로 굴러가는 교대제가 아닌, 4.5시간, 5시간, 6시간 등 근로시간을 잘라 개개인이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시간 파트타임화’다”라고 설명했다.

화학업체 바스프는 꽉 짜인 생산직 교대제에 대해서도 직원 개인의 일정과 선호에 따라 다양하고 유연한 근무형태를 도입할 수 있도록 실험하고 있다. 독일 루드비히샤펜의 바스프 전기설비 부품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제품을 검수하고 있다. 바스프 제공
화학업체 바스프는 꽉 짜인 생산직 교대제에 대해서도 직원 개인의 일정과 선호에 따라 다양하고 유연한 근무형태를 도입할 수 있도록 실험하고 있다. 독일 루드비히샤펜의 바스프 전기설비 부품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제품을 검수하고 있다. 바스프 제공

유연 근무는 회사에도 이득

기업들이 새로운 근무제를 계속 연구하고 혁신하는 일은 독일에서 일반적이다.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활동 중인 이지원 노동전문 변호사는 “회사 인사부서에는 근무제 담당 팀이 따로 있어요. 요즘은 노동심리학자들을 많이 고용합니다. 어떤 형태의 근무를 몇 시간 지속할 때 가장 생산적이고 노동자에게 적당한지 등을 연구하는 이들이죠.” 직원과 경영진의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모델이 제시되면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시범실시해 본 뒤 평가를 거쳐 도입 여부를 결정한다.

이 같은 문화는 30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독일 기업들은 ▦1993년 회사 경영난으로 3만여명을 감원해야 할 상황에서 전 직원의 근로시간을 주 28.8시간까지 대폭 줄여 해고를 막은 ‘폭스바겐형 모델’ ▦주 24시간부터 점차 근로시간을 늘려 가장 생산성이 높을 연차에 최대 시간을 일하다가 다시 줄이는 ‘생애주기형 모델’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부모의 경우 주 25~30시간으로 줄였다가 자녀 성장에 따라 다시 늘리는 ‘가족 근로시간 모델’까지 노사 양측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한 다양한 근무제를 개발, 도입했다.

회사 차원에서 새로운 근무제를 연구하고 유연성을 확산하는 것은,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뿐만 아니라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조 과장은 “직원들이 원하는 환경에서 일하면 집중력의 정도가 다르다. 하는 일의 퀄리티가 한국에서보다 훨씬 높다”고 말했다. 요한 프레이 BMW 인사부문 대외협력팀장도 “약 20년 전 주 35시간으로 근로시간을 줄인 후 오히려 생산성이 높아졌다. 임금 단가가 높아진 셈이지만 사측이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라며 “근로자 개개인의 효율성 향상으로 기업은 계속 성장하고 있고, 작년에도 매출이 9% 증가했다”고 말했다.

경영위기 넘기고 해고 막기도

유연 근무제는 해고를 막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독일은 해고가 엄격히 제한되는 편이라 기업 입장에서도 해고 없이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이 중요하다. 독일 아이젠휘텐슈타트에 위치한 철강업체 아셀로미탈은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2011년 2,000여명을 해고해야 할 정도로 경영난이 깊어졌을 때 경영진과 종업원협의회가 극적으로 ‘공장 맞춤형 근로시간’에 합의해 해고를 막았다. 철강공장의 교대근무를 ‘주간 근무-야간 근무-휴식일’의 3교대에서 ‘오전 근무 이틀-오후 근무 이틀-야간 근무 이틀-휴식 4일’의 4교대로 바꾸고 근로시간 주당 35시간에서 32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이었다. 아셀로미탈은 이렇게 비용을 절감하면서 한 명도 해고하지 않고 위기를 넘겼다. 아셀로미탈 아이젠휘텐슈타트 지사의 악셀 클라우제 사장(인사부문)은 “최근 다시 경기가 회복되면서 희망 직원들에 한해 주 35시간으로 근로시간을 늘렸다”며 “이제는 주 32시간, 35시간 근무가 섞여 있는 공장을 위해 새로운 근무 시스템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24시간 운영되는 독일 루드비히샤펜의 화학업체 바스프 공장. 바스프 제공
24시간 운영되는 독일 루드비히샤펜의 화학업체 바스프 공장. 바스프 제공

독일인들은 새로운 근로시간 모델에 대한 도전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안타스 부장은 “앞으로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등 디지털 혁명으로 모든 산업에서 생산성이 급격히 높아질 것이다. 생산성이 높아지는 만큼 노동자들은 더 여유 있고 잘게 쪼개 일하는 식으로 근무형태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어 “새로운 근무제 모델이 없으면 디지털 혁명으로 감소할 일자리를 지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진행해온 바스프는 이미 준비된 모습이다. 플렉 부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부는 노동4.0이란 이름으로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근로형태를 준비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미 다양한 파트타임 모델, 일자리 분배 모델 등을 갖고 있고, 더 다양한 지역과 조건에 맞는 근무제 개발로 나아갈 겁니다. 회사는 계속 성장할 겁니다.”

루드비히샤펜ㆍ프랑크푸르트ㆍ아이젠휘텐슈타트=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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