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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왕년엔 말이야…” 70대 소매치기의 씁쓸한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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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왕년엔 말이야…” 70대 소매치기의 씁쓸한 독백

입력
2017.08.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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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찰나의 범죄’, 소매치기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서울역 앞에서, 백화점에서, 버스 안에서 호시탐탐 당신 지갑을 노리던 이들은 이제 ‘잘나가던 한때 추억’을 늘어놓는 늙은 전과자들로 남았다.

지난 1월 서울 성북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50대 여성이 소매치기를 당했다. 범인은 일흔을 훌쩍 넘긴 노령 남성 둘. 현재 서울 동부구치소와 경기 의정부구치소에 미결수로 수감 중이다. 둘 중 A(73)씨 인생을 1인칭 형식을 빌려 돌아봤다. 여전히 남의 지갑에 손을 대고 있는, 그로 인해 철창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늙은’ 소매치기 얘기다.

1980년대 사람들은 나를 ‘사장’이라 불렀다. ‘굴리는’ 부하직원만 수백 명이었으니 ‘○사장’이란 말이 전혀 민망하지 않았다. 업계 사람들은 항상 부러운 눈으로 날 올려봤고 ‘기술’을 알려달라며 따라다니는 후배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참 잘 나갔다.

그렇다. ‘사장’은 소매치기 조직 우두머리, 조직원들은 자연스레 ‘회사원’이라 불렸다. 사람이 붐비는 어딘가에서 회사원들은 돈을 벌었고, 일부는 내 주머니로 들어왔다. 기술 전수에 대한 보답이자 그들 신변을 보호해주는 일종의 조직관리 대가였다.

직접 현장을 뛰기도 했다. 다들 현금을 가지고 다녔으니 손에 쥐는 돈은 쏠쏠했다. 직장인들이 월급봉투를 양복 호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퇴근하던 때였다. 우릴 잡겠다고 혈안이 된 형사들도 날 ‘선수’라 부르며 대접해줬다. 형사들에게 소매치기는 워낙 손이 빨라 잡기 힘들고, 까딱하다간 칼날에 제 몸이 다치는 까닭에 범죄집단 가운데 기피 대상이었다.

시작은 미미했다. 버스터미널과 여행사에서 일을 하다 우연히 소매치기에 발을 들인 게 76년. ‘안테나(망보는 사람)’ ‘바람(피해자 시선이나 주의를 끄는 사람)’ 역을 하며 기본기를 다졌다. ‘기계(물건을 훔치는 역할)’의 재빠른 손놀림은 어깨너머로 조금씩 배웠다. 행인 주머니를 터는 법부터 날카로운 면도칼로 가방을 베고 물건을 빼는 법까지. 선배에게 사정해 배운 기술도 있었다.

그러나 소매치기도 세상의 변화를 이길 순 없다. 카드 사용이 일반화하면서 현금 소지자가 줄어들었다. 가방을 털어봤자 수확은 크지 않았다. 곳곳에 폐쇄회로(CC)TV라는 암초가 등장했다. CCTV 눈을 피해 기술을 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옛날처럼 “훔쳤단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발뺌은 통하지 않았다.

회사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사장이란 직함도 무색해졌다. 모두가 떠나갔지만 난 제자리였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고, 손기술이 가진 전부였다. ‘그만하자’고 다짐도 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누군가 가방을 향해 손을 뻗곤 했다. 교도소만 10번 넘게 들락거렸다. 그렇게 일흔 살을 넘겼다.

지난해 출소 후 다시 현장으로 나섰다. 뜻밖에 동료도 생겼다. 버스에서 만난 B(78)씨. 우린 서로가 ‘선수’임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실력이 더 나았던 내가 기계, 그가 바람 역할을 맡았다.

올 1월 20일 낮 12시30분쯤. 버스 안에서 50대 여성의 지갑을 털었다. 손에 52만4,000원을 쥐었다. 3개월 후 우린 성북서 경찰에게 붙잡혔다. 예상한 바지만 형사가 보여주는 CCTV에 우리 범행이 다 드러나 있었다.

28일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 소매치기 발생 건수는 2012년 1,941건에서 2016년 1,046건으로 5년 만에 절반 수준이 됐다. ‘선수’가 사라지고 ‘기술 전수’도 이젠 없다. 형사들은 “곧 소매치기는 멸종될 것”이라고 말했다.

A씨가 수갑을 차고 뒤늦은 후회, 어색한 당부를 했다. “결국 남은 건 아무 쓸모도 없는 못된 기술뿐이죠. 그래도 모두 사라진 건 아니겠죠. 어디서든 당신 지갑의 현금을 노리는 이들은 있을 겁니다. 조심, 조심하셔야 합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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