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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민주당 패싱'이 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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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민주당 패싱'이 더 문제다.

입력
2018.03.29 16:0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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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개헌안 발의 전후 여당 시종 '소외'

당정 공동정부 약속하고도 참모정치 의존

여당 견제 역할 못하면 어떤 개헌도 무용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베트남·UAE 순방 일정을 마치고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고영권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베트남·UAE 순방 일정을 마치고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고영권기자

청와대가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을 쪼개기 공개한 첫날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국민주권을 명료화하고 구체화해서 국민의 막힌 가슴을 확 뚫어 주는 내용을 담았다"고 감읍한 듯 반겼다. 우원식 원내대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분권ㆍ상생ㆍ균형의 새시대 DNA를 수혈했다"고, 또 당 대변인은 "대통령부터 권력을 내려놓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보여 줬다"고 감격과 감동을 표시했다. 민주당은 "대통령 개헌안이 당의 중심적 입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며 여야 개헌협상 테이블에 당론으로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1월 초 신년 회견에서 국회의 개헌논의에 진척이 없으면 3월 중 정부가 개헌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힌 이후, 또 2월 중순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 구체적 개헌안 작업을 지시한 이후, 개헌안 공개 때까지 청와대가 민주당과 개헌문제를 협의한 흔적은 찾기 힘들다. 청와대가 21일쯤 개헌안을 발의하겠다고 하자 민주당이 허겁지겁 26일로 늦춰 달라고 요청한 것은 단적인 사례다. 야당은 헌법에 명시된 개헌안의 국무회의 심의ㆍ의결 절차가 겉치레에 그쳤다며 '국무회의 패싱'을 지적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집권여당을 들러리 취급한 '민주당 패싱'이다.

문 대통령은 개헌안 독자 발의의 첫째 이유로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겠다고 약속한 대선 공약을 얘기했다. 아울러 대통령의 많은 권한을 국민과 국회, 지방과 나누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 나은 헌법,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나은 정치'라는 수사도 동원했다.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야당의 반대는 그렇다 쳐도 전ㆍ현직 국회의장 등 많은 정치원로와 당 중진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통령 발의를 밀어붙인 것은 약속은 이행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동기의 순수성을 얹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개헌은 정치행위이고 정치행위엔 전략적 고려와 함께 반드시 지루한 프로세스가 따른다. 그것을 관리하고 감당해야 할 책임은 전적으로 여당 몫이다. 청와대는 과거에도 사법개혁 등 종종 어려운 의제를 던지며 '국회의 시간'이란 표현을 즐겨 써 왔다. 좋은 제도를 설계했으니 국회가 따라와 마무리해 달라는 뜻이다. 그럴 때마다 민주당은 '멍 때리는' 표정이다. 집권당이라고 하지만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의석을 가진 여당의 한계가 뻔한 데도 역할분담과 재량범위 등에 대한 치밀한 사전 협의나 고민 없이 숙제만 툭툭 던지니 그럴 법도 하다.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동의가 필요한 이번 개헌안의 경우 민주당은 언론 공개 직전에야 11장 137조에 이르는 내용 전체를 봤다는 모욕적인 말도 나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국정운영 시스템의 변화를 강조해 왔다. 그 중심은 여야 간 협치이고 더 들어가면 당정 공동운명체다. 박근혜 정부가 청와대에 반기를 드는 여당에 대해 '배신의 정치' 운운하며 국정농단을 일삼은 게 반면교사가 됐다. 하지만 민주당은 장관 몇 자리에 취한 듯 집권 초 잠시 목소리를 냈을 뿐 줄곧 청와대의 하명을 받드는 돌격대 혹은 출장소의 오명을 답습하고 있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비판하지만 사실 여당이 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 역할을 제대로 해 왔다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총리 선출제니 추천제니 하는 얘기도 여당의 자리가 분명히 확보되지 않으면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모순적이다. 개헌 약속을 지키겠다고 발의한 순간 약속한 시간 내의 개헌은 사실상 물건너간 꼴이니 말이다. 문 대통령은 발의를 서두른 이유 중 하나로 풀어야 할 민생ㆍ외교ㆍ안보 사안이 산적해 개헌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발의한 것으로 개헌을 털어냈다는 인식이 엿보인다. 이 대목은 민주당 패싱의 또 다른 그림자다. 문 대통령이 시끄러운 여의도 정치보다 과제지향적이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참모정치, 여론정치에 맛들여가고 있다는 신호로 들려서다. 매사 그렇듯 패싱도 처음이 어렵고 불편한 법이다. 어떤 설거지도 마다 않고 박수만 치면 고마움도 없어진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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