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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누아르... 폭염 보다 뜨거웠던 ‘검은 시인’의 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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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누아르... 폭염 보다 뜨거웠던 ‘검은 시인’의 랩

입력
2018.07.3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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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래퍼 켄드릭 라마가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보조경기장에서 공연하고 있다. 현대카드 제공
미국 래퍼 켄드릭 라마가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보조경기장에서 공연하고 있다. 현대카드 제공

해가 져 검푸른 하늘. 땅거미가 깔리자 총격 같은 랩이 속사포처럼 터졌다. 공기가 쩡하고 찢어졌다. 달라진 공기, 독을 품은 랩 위로 우아한 멜로디와 비트가 흘렀다. 격정엔 낭만이 매복해 있었다. ‘21세기 검은 시인’이라 불리는 청년의 어두우면서도 아름다웠던 랩의 비장미. 흑인 음악인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래퍼 켄드릭 라마(31)의 공연은 한여름 밤 야외에 펼쳐진 누아르 영화 같았다.

30일 오후 8시 서울 송파구 잠실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 70여 분 동안 이뤄진 라마의 첫 내한

공연은 짧지만 강렬했다.

그는 흑인 래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공연을 시작했다. “내 DNA는 복제할 수 없지…” 흑인의 존엄성을 부르짖는 노래 ‘DNA’였다. 무대 스크린엔 미국 폭스 뉴스의 영상이 나왔다. 백인 해설자가 ‘요즘 힙합은 젊은 흑인들에게 인종차별보다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 장면이었다. 이 논평의 음성은 ‘DNA’에 실제로 실려 있다. 라마는 자신과 힙합 음악의 유해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랩으로 반격하며 무대를 누볐다.

폭염에도 래퍼 켄드릭 라마의 공연을 즐기고 있는 관객들. 현대카드 제공
폭염에도 래퍼 켄드릭 라마의 공연을 즐기고 있는 관객들. 현대카드 제공

라마의 ‘검은 자의식’은 무대를 압도했다. 흑인 영웅(영화 ‘블랙팬서’)을 위해 흑인 음악인들이 아프리카 전통 악기로 만든 흑인 찬가(‘빅샷’ ‘올 더 스타즈’)는 흥겨웠고, 총소리로 스러진 ‘검은 탄성’(‘킹 쿤타’)은 애통했다. ‘킹 쿤타’는 흑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사를 그린 소설 ‘뿌리’와 국내에 방영되기도 한 동명 드라마로 유명한 흑인 노예 쿤타 킨테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곡. 피부색이 다른 한국의 2만 여 관객은 라마의 한이 서린 곡을 마치 제 예기처럼 따라 불렀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관객들의 ‘올라이트’ 떼창이었다.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겨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을거야. 우리 이겨낼 거니까”.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며 겪어야 했던 부조리와 대물림 된 모순, 존재를 부정 받는 래퍼의 포효. 라마의 랩은 세상에서 존재를 잃어가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세대’의 한풀이에 방아쇠를 당겼다. 밴드의 차진 라이브 연주는 라마의 랩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켄드릭, 켄드릭, 켄드릭!” 공연이 중반을 넘어선 오후 9시. 서울 기온이 33℃를 웃돌았지만, 관객들은 라마의 무대가 끝날 때마다 그의 이름을 환호하며 더 뜨겁게 열기를 불태웠다.

진중한 래퍼는 “첫 한국 방문에 신난다”며 “파티를 즐겨보자”며 관객에 윙크를 건넸다. 라마가 팝스타 리애나와 함께 부른 달콤한 사랑 노래 ‘로얄티’와 구름 위를 걷듯 몽환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인 ‘러블리’가 울려 퍼지자 공연장은 달콤한 파티의 현장으로 변했다. 라마는 ‘TOMORROW IS NOT PROMISING’이란 영문이 큼지막하게 적힌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세속적 욕망과 정도를 오가는 갈등을 그린 ‘머니 트리스’부터 록그룹 U2의 보노와 함께 “자유의 여신상이여 내 손을 외면하지 말아줘”라며 반이민정책과 백인우월주의 행보로 일그러진 미국에 대한 풍자까지. 20여 곡을 쏟아낸 그의 무대를 보니 라마의 내일은 그의 티셔츠 문구와 달리 밝아 보였다.

축제 같았던 공연엔 작은 사고도 있었다. 라마가 ‘스위밍 풀스’ 등을 부를 때 그의 랩과 밴드의 합주 소리가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음향 사고였다. 라마의 내한 공연을 기획한 현대카드 관계자는 “라마 측 공연 엔지니어의 실수로 음향 사고가 났다”고 해명했다. 폭염에 야외에서 이뤄진 공연이라 탈진한 관객도 적지 않았다. 일부 관객은 현장 진행 요원의 부축을 받고 공연장 밖으로 이동했다. 공연장에서 응급처치를 담당했던 의료진은 “관객 15명 정도가 탈진해 에어컨 등이 있는 휴게실에서 열기를 식혔다”며 “다만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던 관객은 없었다”고 말했다. 관객들은 기지를 발휘해 무더위를 식히려 안간힘을 썼다. 일부 관객은 상점 판매용 사각 얼음을 봉지째 가져와 더위를 식히며 라마의 공연을 즐겼다. ‘힙합 대세’ 뮤지션의 공연엔 래퍼 지코를 비롯 배우 남주혁 등이 찾아 몸을 흔들기도 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 켄드릭 라마는…

열여섯에 예명 케이닷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고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작은 도시 컴프턴. ‘힙합의 대부’ 닥터 드레가 빈민가에 자란 라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데뷔를 도왔다. 2011년부터 낸 네 장의 정규 앨범은 평단과 대중을 모두 사로잡았다. 특히 지난해 낸 앨범 ‘댐(Damn)’이 수작. 흑인 음악 가수 최초로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을 강력하고 진정성 있는 언어로 포착했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퓰리처상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언론ㆍ문화계상이다. 라마의 랩은 문학뿐 아니라 저널리즘 기능까지 주목 받으며 파장을 낳았다. 이 앨범에 실린 노래 ‘험블’은 빌보드 싱글 차트인 ‘핫100’ 1위를 차지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좋아하는 래퍼로도 유명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5년 피플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즐겨 듣는 노래로 라마의 ‘하우 머치 어 달러 코스트’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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