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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장 마지막에 남는 장면

입력
2018.03.30 14:25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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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춤을 춘다. 음악에 맞춰 팔과 머리를 흔들고, 캡 캘러웨이의 재즈를 따라 부른다. 얼굴 가득 웃음을 날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이 노인은 92세의 헨리 드라이어다. 거동이 불편해 양로원에서 머무는 그에게는 기억력 감퇴와 치매 증상도 있다. 종종 자신을 만나러 오는 딸을 아버지 헨리는 알아보지 못한다. “제가 누구예요?” 아버지의 젊은 날을 선명히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딸은 만날 때마다 눈을 맞추며 끈질기게 묻지만 돌아오는 말은 늘 똑같다. “몰라.” 휠체어에 앉아 눈동자를 허공에 붙박은 채 짧게 대답하는 노인은 꼭 말라버린 나무 등걸 같다.

그러던 그에게 음악이 나오는 헤드셋을 씌우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몸을 살랑살랑 움직이는 장면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 ‘Alive Inside’의 하이라이트다. “음악 좋아해요?” “응, 아주 많이 좋아해.” “특별히 좋아하는 뮤지션이 있어요?” “물론. 캡 캘러웨이의 재즈가 최고야.” “왜 그 사람의 노래를 좋아해요?” “캡의 음악을 들으면 사랑의 감정이 생기거든. 낭만을 느낀다고.”

불과 몇 분 전까지 자기 딸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식물처럼 누워 있던 노인이 어떻게 이처럼 돌변할 수 있을까. 이 감동적인 장면을 소개하면서 언론은 각계 전문가를 동원하고 여러 학자들의 연구논문을 뒤져 기억과 음악이 지닌 신묘한 힘을 다양하게 분석했다. 홀부룩과 쉰들러가 1980년대에 진행한 실험도 그중 하나였다. 여섯 살 차인 두 사람의 음악 및 문화 취향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해 ‘개인의 취향과 선호가 만들어지는 시기는 언제인가’를 학문적으로 실험한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20대 전반기에 형성된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일례로 실험 참가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악이 발표되었을 당시 그들의 나이는 평균 23.5세였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교육 수준이 높든 낮든, 어떤 종교와 문화권에서 살든 이러한 경향에는 편차가 없었다. 그 시절에 처음 접한 노래를 나이 들어서도 즐겨 부르고, 그 시절에 입력한 경험과 상황을 평생토록 간직하며 리메이크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 노인 헨리 드라이어가 좋아한다는 캡 캘러웨이의 재즈 역시 그의 20대 시절을 풍미한 노래다.

오래 알고 지낸 선배를 엊그제 만났다. 2년 전, 선배는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구순 모친의 몸이 많이 쇠약한 데다 치매를 앓아 가족들이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선배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요양병원에 간다. 가서 노래도 흥얼거리고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바지런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을 불러내려 애쓴다. 한 번 잃은 기억은 쉬이 복원되지 않아서 모친은 힘없는 눈을 끔벅이며 선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지만, 아주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면 이제 예순이 훌쩍 넘어 버린 당신 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리 아가, 왜 이렇게 늙은 거야?”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닦아 낸다.

그런데 요 며칠 날이 풀리며 모친의 색다른 성화가 시작됐다고 선배는 전했다. “아줌마, 나 좀 밭에 데려다 줘요. 얼른 가서 완두콩 심어야 해요.” 하도 졸라대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완두콩 팔아서 우리 애들 크레용 사 줄 거예요.” 다른 청춘들이 유행가 들으며 사랑과 낭만에 취하던 그 빛나는 시절에 모친은 오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동동거려야만 했다. 그러니 생의 마지막까지 온몸의 감각과 뇌세포에 남아 도드라진 기억이 바로 그 장면이라며 선배는 껄껄 웃었다.

주말에 모친과 고향 마을에 가서 봄나물이라도 캐야겠다고 말하는 선배를 보고 있자니 내 생의 마지막에 남은 장면은 뭘까, 불쑥 궁금해졌다. 회한일까 아니면 그리움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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