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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교육정책, 좀 더 정교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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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교육정책, 좀 더 정교해져야

입력
2018.01.19 11:07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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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간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방과 후 영어수업 금지를 둘러싸고 노정된 혼선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교육부가 명분과 소신에 매몰된 나머지 사안의 핵심을 놓쳤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정책의 명암을 면밀하게 따지고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도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제라 여겼던 건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독특한 속성과 위상에 대한 심도 있는 고려가 미흡했다는 점이다. 계층상승이 점점 어려워지는 사회에서 한두 명의 자녀만 낳아 기르는 다수 학부모가 경험하는 불안감도 좀 더 살폈어야 했다. 응당 기울였어야 할 관심과 노력이 미흡했던 까닭에 정책 추진의 동력인 당위와 명분은 빛을 잃었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는 권력이자 자본이다. 입시나 취업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막강한 위상을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대학 입시에서 외국어 특기자 전형에 응시한 학생은 수능최저학력기준의 적용도 받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상당수 대학생들은 전공 공부보다는 취업에 필요한 공인영어성적 따는 걸 더 중시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영어 프리미엄이 과연 적정한 수준인지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영어 프리미엄이 과도하다면 이를 해소하는 데 교육부도 응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아울러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영어수업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별도의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아무런 불이익 없이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잘 받을 수 있게끔 말이다. 그래야 조기 영어교육이나 선행학습의 금지가 실효성을 갖게 될 것이다.

영어 능력에 대한 보상을 적정화하는 건 계층 간 교육격차 해소를 위해서도 무척 중요하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영향요인을 분석해 보면 부모 경제력은 영어 과목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학교 공부만 충실히 해서는 고액 유아 영어학원에 다녔고 방학 때마다 해외 어학연수에 참여한 학생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부모와 함께 외국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영어 과목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조기 영어교육에 대한 수요는 중산층 학부모의 대입전략과도 맞닿아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중산층 학부모가 자녀가 어릴 때 영어 실력을 확실하게 다져 놓는 게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관건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사교육 메카인 대치동에서는 영어는 초등학교 때 끝내야 한다는 철칙이 통용되고 있다. 그래야 중학교에 진학한 후엔 수학이나 과학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변변한 대안도 마련하지 않고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영어수업을 금지한 건 명백한 패착이라 하겠다. 결코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이미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소득층 학부모가 느끼는 열패감과 헛헛함을 한층 깊게 할 조치였다.

자녀를 고액 유아 영어학원에 보내지 못하는 저소득층 학부모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치원 방과 후 영어수업이 자녀의 영어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다만 그걸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도 자녀에게 영어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조그만 위안은 얻었을 것이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영어수업 금지를 둘러싸고 불거진 심각한 혼선은 정책당국자에게 적잖은 교훈을 남겼다. 교육정책에서 균형감각에 기반을 둔 정교한 접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일깨워 준 사례가 아닌가 싶다.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담보하진 않는다는 점도 여실히 보여 줬다.

교육열이 유별난 우리 사회에서 풀기 어려운 교육문제 대다수는 사회의 기회구조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 단순히 학교교육의 실패에서 비롯한 경우는 오히려 무척 드물다. 따라서 해묵은 난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는 거시적 안목에서 사안의 본질을 적확하게 파악하여 정교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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