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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 “경찰 차벽의 꽃스티커, 시민이 다시 떼면서 평화집회 완성했죠”

입력
2017.10.28 04:40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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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권 세우려는 시민의 자각ㆍ연대

법원ㆍ경찰의 협조가 어우러지며

“세상에서 가장 멋진 촛불” 만들어

#2

참여연대 양홍석 변호사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 허용

시민의식ㆍ평화 덕분에 가능했죠”

#3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사상최대 232만명 모인 6차집회

대의민주주의 한계 시민이 돌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은 비폭력 평화시위로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지난해 11월 26일 서울 세종로에 세워진 경찰버스에 꽃 스티커가 잔뜩 붙여져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은 비폭력 평화시위로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지난해 11월 26일 서울 세종로에 세워진 경찰버스에 꽃 스티커가 잔뜩 붙여져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년이 지났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경이롭다. 이 땅에 민주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232만명이 운집한 집회도,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도 처음이었다. 권력자의 헌법 유린에 대한 시민의 분노는 그만큼 거셌다. 그러나 저항의 광장은 평화로 충만했다. 장기간 대규모 집회에도 사상자나 연행자는 거의 없었다. 주권자의 권리를 내 손으로 바로세우겠다는 시민의 자각과 연대, 법원과 경찰의 협조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촛불집회”를 만들어냈다.

촛불집회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의 유산이다. 인권 증진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인권상을 수여하는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1994년 상 제정 이래 처음으로 특정인이 아닌, 촛불집회에 참여한 대한민국 국민을 2017년 인권상 수상자로 최근 선정했다.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다. 대한민국 국민의 촛불집회가 이 중요한 사실을 전세계 시민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고 밝혔다.

2016년 10월 29일 첫 촛불부터 올해 4월 29일 23차까지 기적의 집회를 이끌어간 주역들은 촛불이 가장 환하게 빛났던 순간을 언제로 기억하고 있을까.

촛불집회를 이끈 주역인 박미애(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장애인정보문화누리 활동가, 박혜신 전 박근혜퇴진전국대학생시국회의 집행위원, 참여연대 공익법센터소장 양홍석 변호사,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이강훈 작가. 본인 제공ㆍ연합뉴스
촛불집회를 이끈 주역인 박미애(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장애인정보문화누리 활동가, 박혜신 전 박근혜퇴진전국대학생시국회의 집행위원, 참여연대 공익법센터소장 양홍석 변호사,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이강훈 작가. 본인 제공ㆍ연합뉴스

경찰차에 붙인 꽃 다시 뗀 시민의식

경찰이 버스차량을 동원해 시위대를 가로막는 차벽은 흔히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부딪치는 가장 아슬아슬한 폭력의 폭발지점이다. 촛불집회 때도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는 차벽이 있었다. 이를 타고 넘으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시민들은 “비폭력”을 외쳤다. 자발적인 평화 집회의 기조는 차벽을 꽃 스티커로 뒤덮는 장면에서 강고히 뿌리를 내렸다. 꽃벽 프로젝트를 주도한 이강훈 작가는 “3만장의 꽃 스티커를 들고 광장에 섰던 2016년 11월 19일 4차 촛불집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전체 집회에서 약 60만장의 스티커가 배포됐고, 150여명 작가와 100여명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의 순간은 시민들이 꽃 스티커를 다시 떼는 모습이었다. “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차벽에 줄줄이 붙어 서서 스티커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있는 거에요. ‘차벽이 사라져도 평화 집회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이요. 경찰에게 스티커를 떼는 수고를 지우지 않겠다는 마음도 있었죠.” 아무리 꽃 스티커라도 경찰차를 훼손하는 것은 불법이었고, 이런 이유로 곱지 않게 보는 시민도 상당했다. 평화 집회에 대한 강박관념과도 같았다. 이에 멈추지 않고 스스로 만든 꽃벽을 원상복구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촛불집회의 끝은 평화로울 것임을 확신했다”고 이씨는 말한다.

평화 집회는 이제 무르익었다. 폭력 시위도, 물대포도 찾아보기 어렵다. 촛불의 유산 중 하나다.

“집회의 자유 더 중요” 청와대 앞 열린 날

청와대 코앞에서 시민들이 ‘하야’ ‘탄핵’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법원 덕분이었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소장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집회 시작 1시간 전에야 법원으로부터 집회 허용 결정을 받아낸 11월 5일 2차 촛불집회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날 오후 2시 경찰은 광화문ㆍ종로 일대 행진을 신고한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등에 ‘교통마비’ ‘안전사고 위험’ 등을 이유로 집회금지를 통고했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 양 변호사는 오후 5시에 법원에 금지통고를 취소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서를 냈다. “많은 분들이 무의미한 신청이라고 했어요. 토요일에 법원이 심리를 한다? 말도 안 되죠. 사실 저도 나중에 불법 집회로 누군가 형사처벌을 받으면 법원을 탓하려고 가처분 신청을 내고 보자는 거였어요.”

그러나 집회 금지-불법 집회 낙인-무력 진압과 갈등 격화라는 뻔한 예상, 틀에 박힌 악행이 드디어 뒤집혔다. 집회 당일 오후 서울행정법원은 “교통 소통의 공익이 집회 시위 자유 보장에 비해 크다고 보기 어렵다”며 촛불 시민 손을 들어줬다.

법원의 결단은 이어졌다. 야당이 탄핵소추안 발의를 미뤄 국회 표결이 무산된 다음날인 12월 3일 법원은 법이 허용하는 최대 한도인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집회 주최측마저 놀랐다. 법과 공권력도 국민 위에 있지 않다는 헌법정신이 새삼 확인된 순간이었다.

양 변호사는 “모두 시민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이 막힐 때마다 시민의 힘을 믿었어요. 결과적으로 집회 때마다 보여준 평화 유지의 열망, 쓰레기까지 치우고 가는 시민의식이 그 길을 열어준 셈이에요. 경찰이나 법원이 이를 막을 근거가 없었으니까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겐 그 의미가 남달랐다. 참사의 진실을 감추려 했던 박근혜 정권은 청와대 앞으로 찾아온 유가족을 향해 “순수 유가족이면 만나겠다”(민경욱 당시 청와대 대변인)며 불순시하고 외면했다.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촛불이 타오르기 전 이미 광화문광장엔 세월호 참사의 비극이, 유가족의 슬픔이 서려 있었다”고 말했다. 1,700만(23차례 집회 누적 참가 인원) 시민과 함께 서자 그렇게 열리지 않던 길이 열렸다. “매번 청와대에서 200m 거리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에서 가로막혔었어요. 처음으로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을 한 그 날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습니다. 만감의 감정이 교차했죠.”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의 부실 대응과 거짓 해명은 계속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태운 파란 고래풍선을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으로 옮기고 있는 시민들. 연합뉴스
세월호의 아이들을 태운 파란 고래풍선을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으로 옮기고 있는 시민들. 연합뉴스

광장에 선 나, ‘우리’가 되다

박혜신 전 박근혜퇴진전국대학생시국회의 집행위원은 처음 3만명이었던 집회 참가자 규모가 100만명으로 불어난 11월 12일 3차 촛불집회를 보며 시민의 연대를 실감했다. 11월 9일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공식 출범, 전국 각계 1,5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나선 데다 11월 3~6일 최순실ㆍ정호성ㆍ안종범씨 구속으로 국정농단의 단면이 속속 드러나 공분이 높아진 결과였다. 박 전 집행위원장은 “시민사회 연대감, 특히 청년층의 연대감이 생긴 것”을 촛불의 의의로 꼽았다. “특혜 인생을 살아온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를 보며 많은 청년들이 분노했고, 광장으로 달려 나왔죠. 그 동안 경쟁사회에 치이고, 먹고 사는 것만 신경쓰기에 바빠 개인주의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는 “시민들이 함께 저항하고, 결국 권력이 물러나는 걸 보며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촛불집회의 수확”이라며 “그 자신감이 앞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쓰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대와 승리의 경험은 어제와는 다른 시민의 참여를 낳을 것이다. 촛불의 가장 찬란한 유산이다

소수자와 약자를 보기 시작하다

촛불이 타오른 광장에서 연대의 폭은 평소 무관심했던 소수자까지 아울러 넓어졌다. 10월 29일 1차 촛불집회에 수화통역사가 없는 것을 발견한 박미애 장애인정보문화누리 활동가는 퇴진행동 측에 제안해 수화통역지원팀을 꾸려 활동했다. 소통의 광장에 장애인도 함께 하자는 취지에 주최측은 선뜻 동의했지만, 배려는 부족했다. 통역사의 수화가 잘 보이도록 조명이 필요했지만 따로 지원되지 않아 자체적으로 휴대폰 조명을 켜야 했던 게 단적인 예다. 박씨는 집회가 끝날 때마다 청각장애인 의견을 모아 주최측에 전달, 다음 집회에 반영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청각장애인이 설 자리는 조금씩 넓어졌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직접 마주하고, 소통할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광장에서 함께 부딪히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됐죠. 촛불집회에 참여한 많은 분들이 하나같이 얘기하는 게 있어요, ‘집회를 통해 국민으로서 소속감을 느꼈다’고.”

박씨는 “2016년 마지막 날 제10차 촛불집회에서 청각장애인 김세식씨가 무대에 오른 순간이 또렷하다”고 했다. “무대에 오르더니 수화로 ‘저 작은 창(수화통역사가 나오는 작은 화면)이 누군가에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아달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음성언어로 통역하던 순간, 벅찬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는 “많은 국가에서 국정브리핑 등 중요한 자리에 늘 수화통역사를 배치해요. ‘어디에나 장애인이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죠. 우리도 이제 수화언어를 배려가 아닌 장애인의 권리로 보장해야 해요”라고 강조했다.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는 촛불 시위대. 한국일보 자료사진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는 촛불 시위대.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치가 실패할 때 시민이 나선다

촛불집회 참가자라면 당연히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도 그랬다. 여론 눈치를 보느라 탄핵소추안 발의에 미적거리던 정치권을 사실상 촛불이 밀어붙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3당은 12월 2일 탄핵소추안을 국회 본회의서 의결할 계획이었지만 이를 앞두고 11월 29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3차 대국민담화에서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고 떠넘기자 흔들렸다. “사실상 하야 선언”이라는 여당의 주장에 탄핵 발의가 주춤했다. 지역구 표심을 계산하느라 바쁜 정치인의 행태에 국민의 실망은 깊었다. 민심은 곧 확인됐다. “12월 3일 제6차 촛불집회에 사상 최대 인원인 232만 명이 모였어요. 국민의 목소리를 국회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거죠.” 결국 12월 9일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시민들이 직접 돌파한 것이었다. 정 대표는 “위대한 시민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퇴진행동기록기념위원회 공동대표로 28일 오후 6시 광화문광장에서 열릴 촛불집회 1주년 기념행사를 이끄는 정 대표는 “촛불시민을 기억하고, 우리가 이룩한 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의미도 있다. “촛불시민이 열망하는 개혁과제가 흔들림 없이 추진돼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촛불집회를 주도한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주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저 시민이 모두 나설 수 없었기에 대신 나선 대리인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강조했다. “그 모습이 어떠할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오고야 말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계속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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