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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탈 원전, 이제 얘기 좀 해 보자는데

입력
2017.07.1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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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쯤 전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하루 일정으로 내가 살던 부산 근처 산업시설을 견학하는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TV로만 보던 고리원전을 직접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본 만화 ‘아톰’에 익숙하던 초등학생 꼬마에게 ‘원자력’ 발전은 ‘대망의 80년대’를 이끌어나갈 최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였다. 지나고 보니 대망의 80년대를 움직였던 주역은 정작 그 구호를 앞세웠던 독재자 전두환이 아니라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국민들이었고, 새 시대의 동력인 줄 알았던 원자력 발전은 체르노빌 참사로 80년대를 얼룩지게 했다.

작년 추석쯤 모두를 놀라게 했던 경주 지진은 고향 사람들에게 고리 원전과 거의 자동으로 연결돼 있었다. 30여 년 전보다 인구가 줄긴 했어도 지금 부산에는 350만 명이 살고 있다. 울산 인구는 100만이 넘는다. 고리 발전소에서는 최근 가동이 영구 중지된 1호기를 제외하고 6기의 원자로가 가동 중이다. 신고리 4호기는 건설 중이며 5ㆍ6호기는 며칠 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이사회에서 공사작업을 일시 중지시켰다. 고리 원전 반경 30㎞ 안에는 380만 명이 살고 있다. 원전이 6기 이상 있는 지역 중 사람이 가장 많다. 2011년 전대미문의 사고가 있었던 일본 후쿠시마 원전보다 22배나 많다.

경주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국내 핵발전소의 안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충분한 동기를 제공했다. 한국은 지진의 안전지대라거나 핵발전소 사고가 나더라도 철저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신화에 의심을 가져볼 법한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위험을 계속 안고 갈 것인지, 우리는 얼마만큼의 위험과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 국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사회적인 합의를 새로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수원 이사회에서 신고리 원전 5ㆍ6호기 공사를 잠시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 과정을 위한 조치였다.

고향집 코앞에 원전이 6기나 가동 중인 상황이 매우 못마땅한 내 입장에서는 탈원전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의 행보가 몹시도 더뎌 보인다. 5ㆍ6호기 건설을 잠시 중단하기보다 영구적으로 중단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찾아주길 바랐으나, 5ㆍ6호기 건설을 계속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를 시민배심원단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할 때까지만 일시적으로 멈췄기 때문이다. 원전 지을 때는 언제 사회적인 논의라도 했었던가?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지난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탈원전 과정을 생각해보면, 그 첫 단추는 이런 방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나는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지금은 한국 사회에서 탈원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꺼내 본 단계가 아닌가. 이제 겨우 얘기 좀 해 보자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첫째, 5ㆍ6호기 건설 잠정 중단을 마치 영구 중단인 것처럼 호도한다. 명백한 허위주장이다. 시민배심원단의 결정에 따라 완전히 중단될 수도, 다시 건설이 재개될 수도 있다. 둘째, 건설 잠정 중단에 따른 비용이 1,000억 원, 영구 중단 때 매몰비용이 2.6조원에 이른다고 아우성이다. 세월호 참사도 사람 목숨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긴 결과였음을 벌써 잊은 모양이다. 비용을 제대로 비교하려면 5ㆍ6호기 완공까지 비용과 거기서 나오는 핵폐기물 처리비용, 훗날 원자로 폐쇄 비용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영구정지가 결정된 고리1호기 해체비용은 수천억 원에서 1조 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부지복원에 15년 이상 걸리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셋째, 세계 원전시장을 놓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역으로 원전해체 시장을 새로 개척할 수도 있다.

넷째, 전력수요를 감당할 수 없고 전기요금이 대폭 오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태양광발전이나 풍력발전 등이 당장 원전을 대체할 만큼 효율적이지 않다. 신재생에너지 발전비율이 OECD 최저 수준인 현실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가까운 미래까지는 신재생에너지가 원전의 효율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전기요금은 당연히 오를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과연 탈원전이라는 결정이 전력수요를 줄이고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고통을 참아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합의해야 한다.

다섯째, 국가 주요정책 결정권을 비전문가에게 맡겨도 되냐는 비난도 들린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전쟁 결정권은 군사전문가에게, 개헌은 헌법학자들에게만 맡겨야 한다.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이다. 정치 전문가들이 체육관에 모여서 결정할 일이지, 장삼이사 시정잡배들이 그렇게 중요한 국가적 대사에 투표권을 가진다는 게 말이 되나?

전문가의 역할은 최종결정이 아니다. 최종결정은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전문가가 할 일은 주권자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판단의 근거를 객관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그게 민주공화국이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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