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칼퇴 한번 하려 말 꺼냈더니… "집에 무슨 일 있나" 동료들까지 수군

입력
2015.06.09 18:54
0 0

대기업 근무 박차장 / 메르스… 어색한 핑계로 나왔지만

집 향하는 발걸음 내내 무거워

공공기관 근무 정대리 / 육아휴직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인간의 탈 운운… 상사의 질책만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2일 오후 6시5분 서울 중구 대기업 A사 사무실. 팀원 모두가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박상기(40ㆍ가명) 차장이 정적을 깨고, 상사인 상무에게 퇴근을 고했다. 한국일보가 제안한 ‘가족 식사를 위한 정시 퇴근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평소 자기 할 일을 다했는데도 남들이 야근한다는 이유로 눈치 보며 남아있어야 하는 비효율적인 야근 문화를 혐오했던 박 차장은 기꺼이 실험에 응했다.

하지만 그런 박 차장도 퇴근 시간인 6시가 다가오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계 바늘이 6시를 가리켰지만 10명이 넘는 팀원 가운데 퇴근하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퇴근하겠다는 말은 도저히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이유를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

“머리가 약간 어지러운 게 메르스가 의심됩니다. 허허.” 냉랭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던진 어색한 농담에 상무는 무덤덤하게 “들어가보라”고 했다. 예상했던 만큼의 끔찍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박 차장의 퇴근 발걸음이 가볍진 않았다.

다음날 실험을 위한 미션 수행이었다는 설명에 상사인 상무는 “사연이 있어 간다면 당연히 허락해야 한다고 본다”면서도 “평소 업무량이 많기 때문에 매일 정시 퇴근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선을 그었다. 윗사람이 집에 가지 않으면 부하 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불필요한 야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퇴근하기 싫어서 안 가는 게 아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 일정 시간까지 대기하다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험 직후 박차장은 “무리해서라도 퇴근을 하지 않으면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 얼굴 보기 힘들다”며 “장모님 댁에 맡겨진 초등학생 딸들이 평일에 아빠를 보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협력사 관계자들과의 저녁 약속자리가 많은 박 차장은 오후 11시 넘어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주 3회 이상이다. 약속이 없는 날도 사무실 분위기 상 오후 7시30분은 넘어야 퇴근한다.

차장급 직원들의 정시 퇴근이 이토록 어려울 정도이니 대리나 사원들의 ‘칼퇴근’은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대기업 B사의 5년차 서민아(29ㆍ여ㆍ가명) 대리는 실험을 수행했던 3일, 퇴근 2시간을 앞둔 오후 4시부터 긴장감 때문에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퇴근 시점에 팀장 기분이 좋아야 할텐데’, ‘일을 다 해놓고 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업무 메일을 하나 보내놓아야 할까’ 등 별별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하필 실험 당일 동료가 집안 사정을 이유로 ‘선빵’을 날리는 바람에 일은 더 꼬여버렸다. 칼퇴근이 한꺼번에 몰리면 분명 팀장은 “너희들 왜 이래”라며 신경질을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팀장은 몇 달 전 팀원들이 돌아가며 오후 6시30분쯤 퇴근하자 “늦게까지 일도 안하고, 주말에 회사에 나오지도 않는 당신들은 내 앞에선 힘들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던 사람이다.

하지만 서 대리는 더 지체할 수 없어 6시15분쯤 퇴근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팀장의 대답은 날카롭고 간결했다. “어.” 평소 “응, 그래~”의 상냥한 말투와는 확연히 달랐다. 앞서 정시에 퇴근해버린 동료 때문인지 표정엔 이미 불만이 가득했다.

서 대리는 “야근을 하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다”며 “자기 할 일을 다 했으면 정시에 퇴근하는 게 맞는데 퇴근하기 위한 이유를 생각해내야 하고 상사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게 괴로웠다”고 말했다.

평소 정해진 업무시간보다 1~2시간 정도 더 일하고 가는 분위기여서 서 대리 역시 박 차장처럼 가족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은 꿈 같은 일이다. 서 대리는 “일주일에 하루 가족과 저녁을 먹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라며 “남편 회사도 야근을 밥 먹듯 시키는 곳이라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기업 C사에 다니는 안성윤(28ㆍ가명) 주임도 비슷한 실험 결과를 얻었다. 2일 오후 6시10분 안 주임이 “오늘 일찍 퇴근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팀장은 대뜸 “집에 무슨 일 있냐”고 물었고, 주변 동료들도 “무슨 일이냐”며 수군거렸다.

그는 “퇴근해야 하는 이유를 대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분위기라 압박감이 심했다”며 “매일 정시 퇴근을 시도했다가는 평판에 문제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런 분위기 탓에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안 주임 역시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저녁 식사를 같이할 뿐이며, 대화 시간은 길어야 하루에 15분 정도다.

칼 퇴근 실험은 그나마 해볼만한 것이었다. 육아 휴직을 시도한 참가자는 아주 험한 꼴을 당했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정윤식(35) 대리는 4일 오후 팀원들이 모인 회의에서 “육아 휴직을 쓰겠다”는 말을 꺼내는 실험을 수행했다. 육아휴직은 법적으로 보장된 제도지만 회사 사정과 주위 시선 등을 고려하면 쉽게 사용하기 힘든 게 우리 현실이다.

역풍은 생각보다 컸다. 정 대리의 바로 위 상사는 볼펜을 집어 던지며 “이 상황에서 갈 수 있는 거야? 규정에 어떻게 돼 있나 찾아봐”라고 소리쳤다. 직장 내 육아 휴직자 가운데 남직원 비율이 3%뿐인데다 본사의 지방 이전을 앞둬 업무가 많은 상황이라 반응은 예민하고 거칠었다. 급기야 상사는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몰아세웠고, “머리 아프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보자”며 논의를 덮었다. 정 대리는 “사실상 휴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들렸다”며 “실제 상황이었다면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시 퇴근과 육아 휴직은 직장인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여전히 우리 직장 문화에서는 놀라운 일이거나 상사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편한 일’인 경우가 많았다. 반복되는 야근과 잦은 회식을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선진국의 직장 문화와는 대조적인 풍경임에 틀림없다.

채지선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