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소영 기자

등록 : 2017.08.29 11:00
수정 : 2017.08.30 15:35

돈과 권력에 휘청대는 미국 언론

넷플릭스 다큐로 보는 ‘트럼프의 미국’ <하> 침묵을 거래하는 손

등록 : 2017.08.29 11:00
수정 : 2017.08.30 15:35

헐크 호건이 고커 미디어와의 소송 재판에서 증언 전 선서를 하고 있다. IMDb

미국의 유명 프로 레슬러로 한국에도 유명한 헐크 호건(본명 테리 진 볼레아)은 2012년 미국 온라인 가십 매체 ‘고커’가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했다며 고커미디어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고커가 헐크 호건이 친구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영상을 입수해 온라인에 기사와 영상으로 보도한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지난해 3월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고커 미디어에게 1억 4,000만 달러(약 1,653억원)의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부과하면서 헐크 호건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이 소송의 뒤에 실리콘 밸리의 거물인 피터 틸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지난 6월 넷플릭스에 공개된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침묵을 거래하는 손(Nobody Speak: Trials of the Free Press)’은 헐크 호건 대 고커 미디어의 소송의 과정과 미국의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다루며 금권으로 언론사를 통제하려는 갑부들의 움직임을 담았다.

애초 헐크 호건과 고커 미디어간의 소송은 미국 수정헌법 1조가 수호하는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를 쟁점으로 큰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소송 과정에서 몇 가지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있었다. 헐크 호건이 고커의 보도 초기에는 다른 방송에서 이 내용으로 농담을 할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 헐크 호건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신적 손해배상과 관련된 소송 하나를 취하해 고커 측에 큰 비용 부담을 안긴 점,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헐크 호건이 어떻게 막대한 소송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가 등이었다. 결국 누군가가 고커 미디어를 망하게 하기 위해 헐크 호건 소송 뒤에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15년 내한한 피터 틸이 서울 연세대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헐크 호건 지원한 실리콘 밸리 거물의 복수

언론에서 이 소송의 배후로 지목한 사람은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이자 초기 페이스북의 투자자로도 알려진 실리콘 밸리의 거물 피터 틸이었다. 틸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헐크 호건의 소송 비용을 지원해줬다고 인정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며 틸과 고커 미디어간의 악연도 주목을 받았다. 2007년 고커 미디어의 또다른 매체인 ‘밸리왜그’에서 그가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기사를 썼다. 틸은 이 기사에 크게 분노하고 이후 고커 미디어에 대한 복수로 헐크 호건의 소송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틸은 “고커는 대단히 악랄하고 반사회적인 깡패”라며 “다른 언론사들은 그쪽 사람들과 조금도 같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커측은 고커 미디어가 다른 언론사들은 덮어두는 틸의 실리콘 밸리 거물 친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사업 실패들을 가감없이 폭로해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고커 미디어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고 주장했다.

틸은 이후 “고커 이외의 언론 소송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언론을 파괴할 목적으로 금권을 동원하는 행동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틸은 실리콘 밸리의 유명인사 가운데 유일하게 트럼프 대통령 후보 지지를 밝히며 또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후 백악관 인수위원회에 들어갔고, 그의 몇몇 측근은 트럼프 행정부에 합류하기도 했다.

셸든 아델슨 라스베가스 샌즈 회장이 2013년 컨퍼런스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카지노 대부’의 깜깜이 매입… 네바다 주 최대 언론사에 생긴 일

그렇다면 틸의 말처럼 ‘악랄하고 반사회적 깡패’ 같은 언론사만 갑부들의 타겟이 되는 것일까. 2015년 네바다 주의 지역 언론사 ‘라스베이거스 리뷰 저널’의 기자들은 어느날 갑작스럽게 회사의 매각 소식을 듣게 됐다. 라스베이거스 리뷰 저널은 네바다 주의 카지노 등 핵심 산업과 지역 정치 현안을 주로 다루는 네바다 주 최대 규모의 언론사다. 문제는 회사를 산 투자자가 누군지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투자자가 누구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것뿐이었다.

비밀에 쌓인 새 사주에 대한 수개월간의 기자들의 끈질긴 취재 결과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대부’ 셸든 아델슨 라스베이거스 샌즈 그룹 회장의 사위가 새로운 투자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큰 카지노를 운영하던 아델슨은 마카오에서의 카지노 사업도 성공하며 미국에서 손에 꼽히는 부호가 됐다. 뿐만 아니라 공화당 정치인들의 주요 자금줄이기도 했던 아델슨은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고액을 기부했다. 그런 아델슨 집안이 지역 권위지를 비밀리에 매입했다는 것은 언론 보도에 영향을 끼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아델슨 집안의 끈질긴 부인에도 기자들은 결정적 증거를 찾아 2015년 12월 17일자 라스베이거스 리뷰 저널 1면에 기사를 내보냈고, 아델슨 집안도 이를 인정하는 성명을 낼 수 밖에 없었다. 해당 기사를 쓴 기자들은 아델슨 측의 명예훼손 소송 등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고, 많은 수가 회사를 떠났다.

지난 2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컨벤션에서 열린 대규모 지지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피닉스=AP 연합뉴스

비판 언론에 “명예훼손법 개정” 으름장 놓는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명예훼손법을 개정해 언론사 고소를 더 쉽게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CNN 등 주류 언론들이 자신에 대한 가짜뉴스를 보도한다며 언론사들은 이에 대한 책임감을 더 느껴야 한다는 논리에서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7개월을 맞았지만 언론과의 적대적인 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CNN과 MSNBC 방송에 대해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지난 23일자 월스트리트저널 최종판에는 반(反) 트럼프 집회 보도 기사의 일부 문장이 삭제되는 등 보도 통제 비판이 일기도 했다.

다큐멘터리는 ‘언론보도는 권리장전에 명시돼 법으로 보호를 받는 유일한 직업’이라는 토마스 제퍼슨의 말까지 빌려오며 마무리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의 말까지 빌려올 정도로 트럼프 시대에서 미국 언론의 위기감은 크고도 깊은 셈이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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