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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2016년에 살기 위하여

입력
2016.11.1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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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변호인이 말했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다.”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가 열린 이후 귀를 의심하게 되는 소식이 하루에 몇 번씩이나 들려왔지만, 이번 변호인의 발언은 또 다른 차원이다. 대통령과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으로 95%의 국민이 분노와 상실감을 느끼고 매일 터져 나오는 비리의 초현실적인 규모 앞에 무기력한 일상을 직면해야 하는 이때, 대통령이 자신의 무능을 막는 방패로 여성성을 내세운 것이다. 공무 집행 시간에 어떤 공무를 집행했는지 밝히기를 요구했을 뿐 그 누구도 대통령의 사생활을 물은 사람이 없건만,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방패막이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대통령으로서의 공적인 자아와 개인, 특히 여성으로서의 사적인 자아를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사회가 여성을 보는 편견 아래 숨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후보 시절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구호로 팔았던 대통령이 불리해지자 ‘외롭고 슬픈 여성’의 이미지를 내세우니 보고 있는 국민은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이 발언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와 즉각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해악이다. 그 어떤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내세워 공적인 업무 시간을 7시간씩 비우고도 사생활이니 묻지 않기를 요구하는가. 매일 바닥이 무너지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일하고 생활하는 모든 여성에게 사과해도 모자란 비겁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본인과 변호인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대통령 개인의 무능과 잘못을 대통령의 성별과 연결 짓는다. 구속된 최순실을 향한 강도 높은 비난에는 여성을 비하하는 욕설이나 ‘강남 아녀자’와 같은 표현이 빠지지 않는다. 대통령이 ‘사사로운 인연’으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 것과 대통령의 성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최근 제기되는 의료 기록과 관련한 문제들이 모두 사실이고 대통령이 한 드라마의 여주인공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대통령과 관련해 폭로되는 수많은 한심하고 허황된 일 중 그 어느 것도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원인이 될 수 없다. 대통령이 ‘암탉’이라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을 암탉에 비유하는 것 역시 여성혐오다. 모르면 외워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시절을 풍자하고 한순간 ‘사이다’를 위해 쏟아내는 말 속에서 여성혐오의 흔적을 찾아내 지적하고 수정하려는 노력의 가치를 깨달아야만 한다.

지난 5일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진행자가 대통령을 비난하다 여성을 비하하는 욕설을 사용한 일이 있다. 발언 당시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은 이전 구호를 외칠 때보다 작았고, 진행자는 바로 다음 발언 때 욕설에 대해 사과했다. 많은 것이 여전하지만, 변하는 것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대통령의 무능과 박근혜 정권의 처참한 실패가 여성의 무능과 실패가 아님을 소리 높여 말해야 한다. 힐러리 클린턴의 미 대선 낙선에 대해 ‘(미국인들이) 한국의 여성 대통령이 저지른 일들을 보고 그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농담하는 이에게 절대 웃어주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모르고 살았더라면 어찌할 뻔했느냐’는 탄식이 매일의 저녁상과 술자리에 울려 퍼질 때, 정유라의 부정입시와 특혜 의혹을 제기하여 이 사태가 드러나는 시발점이 되었던 이대생들을 떠올려야 한다. 평화 시위를 말할 때, 그 평화와 안전이 여성과 청소년, 소수자에게도 보장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아니었음을 알았다면 개선에 힘을 보태야 한다. 권력의 부패와 비리의 척결, 시스템의 재건은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약자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거나, 그 혐오를 지적하는 일이 그보다 덜 중요한 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나라와 정권이 아무리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국민 만은 2016년에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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