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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고발자 중요성 알려야” 홍기선 감독의 마지막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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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고발자 중요성 알려야” 홍기선 감독의 마지막 바람

입력
2018.01.18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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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급기밀’에서 박대익(김상경) 중령이 군 비리를 폭로하려다 식구 같았던 군인들에게 총으로 협박 당하고 있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영화 ‘1급기밀’에서 박대익(김상경) 중령이 군 비리를 폭로하려다 식구 같았던 군인들에게 총으로 협박 당하고 있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영화 보고 눈물 흘린 군 내부고발자들

지난달 15일 강원 원주시. 최강혁 총괄 프로듀서 등 영화 ‘1급기밀’ 스태프들은 홍기선 감독의 납골 묘를 찾았다. 홍 감독의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는 김영수 전 해군 소령도 함께 했다. 2009년 계룡대 군납 비리를 폭로한 내부고발자로 ‘방산 비리’를 다룬 이 영화에 모티프가 된 인물이다.

홍 감독은 2016년 이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급기밀’ 촬영을 마친 뒤 엿새 뒤에 돌연 숨을 거둬 영화를 세상에 직접 선보이지 못했다. “감독님, 다음 달 영화 개봉합니다.” ‘1급기밀’ 후반 작업을 마친 스태프들은 홍 감독에 영화 개봉 소식을 전했다. 한 달여가 지나 11일 서울 광진구의 한 멀티플렉스 극장. ‘1급기밀’ 첫 언론시사회를 찾은 김 전 해군 소령과 조주형 전 공군 대령은 영화를 함께 보고 눈물을 흘렸다. 조 전 대령은 2002년 차세대 전투기 도입 외압설을 제기했던 내부고발자였다.

“우린 식구”란 말 속 폭력

오는 24일 개봉하는 ‘1급기밀’은 한국군의 고질병처럼 여겨지는 방산 비리를 정면으로 꼬집는다. 1998년 국방부 조달본부 군무원의 전투기 납품 비리 폭로 등 실화를 바탕으로 해 현실감이 생생하다. 적폐청산이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시기에 개봉을 앞둬 시사점이 크다.

한국 영화 최초로 방산 비리를 다룬 만큼 내용은 강렬하다. 박대익 항공부품과 중령(김상경)은 군 내부 비리로 고심한다. 방송국 여기자 김정숙(김옥빈)의 도움을 얻어 진실을 밝히는 길은 첩첩산중이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이 “우린 식구”라며 비리에 눈감기를 강요하는 모습은 섬뜩하다. 식구를 등지고 바른 길을 걸으려는 내부고발자에 돌아오는 건 조직의 멸시뿐이다. 영화는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에 분노를 이끈다. 홍 감독 특유의 묵직함이 빛난다.

홍 감독은 무겁고 어려운 방산 비리란 소재로 왜 대중 영화를 만들려 했을까. 호기심은 2000년대 초ㆍ중반 신문에 실린 박대기 씨의 부고 기사에서 시작됐다. 1998년 외국 무기 부품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비싸게 사 온 관행을 폭로한 뒤 보복성 인사 조처를 당했고 퇴직해 건강 악화로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보고 내부고발자의 불행한 삶에 관심을 두게 된 홍 감독은 2009년 MBC 시사고발프로그램 ‘PD수첩’에서 방송된 ‘한 해군 장교의 양심선언 편’을 보고 방산 비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을 굳혔다. 홍 감독의 ‘1급기밀’ 기획 과정을 지켜 본 최 PD는 17일 “홍 감독이 내부고발자의 사회적 중요성을 영화를 통해 알리고 싶어 했다”며 “전작과 비교해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방법을 더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귀띔했다.

국내 독립영화 1세대의 간판이었던 홍 감독은 약자의 편에서 사회성 짙은 작품을 주로 내놨다.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다룬 ‘선택’(2003)과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한국인 대학생이 살해된 사건을 조명한 ‘이태원 살인사건’(2009)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홍 감독에 영화는 “고단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매체였다. 그래서 현실을 알리고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홍 감독이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는 ‘한국의 켄로치’라 불린 이유였다. 홍 감독은 1980년대 민중독립영화제작단체인 장산곶매 창단 멤버였다. 그는 당시엔 금기였던 5ㆍ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오! 꿈의 나라’(1989)를 만들어 영화계에 입문했다. ‘오! 꿈의 나라’를 연출한 이은 명필름 대표 겸 감독은 홍 감독을 이렇게 기억했다. “참 일관성 있었죠. 돈을 좇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인간성 회복에 대한 희망을 담은 영화를 만든다는 게 시장에선 어려운 일이잖아요.” 이 대표는 홍 감독이 찍은 ‘1급기밀’을 김상범 편집기사와 편집을 함께 해 영화를 완성했다.

고 홍기선 감독. 영화 ‘이태원 살인 사건’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 홍기선 감독. 영화 ‘이태원 살인 사건’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참 바보 같다” 비아냥… 몸값 낮춘 배우들

‘1급기밀’은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 곡절이 많았다. 기획에서 극장 상영까지 무려 8년이 걸렸다. 가장 큰 걸림돌은 투자 받기였다. 홍 감독은 ‘1급기밀’ 제작을 이명박 정부 때 추진하다 번번이 투자 거부를 당했다. 민감한 소재 탓이었다.

홍 감독과 최 PD는 당시 “참 바보 같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 몰라? 답답하게”란 말을 영화 관계자들에 수도 없이 들었다. ‘1급기밀’에 필요한 제작비는 25억원. 개인투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왔고, 김상경 등 주연 배우들이 자진해서 ‘몸값’을 낮춰 영화 제작이 이뤄졌다. 김상경은 “영화 ‘화려한 휴가’ 출연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랐더라”며 “방산 비리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출연했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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