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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기자

등록 : 2018.01.01 04:40

[세시기] "충심으로 주변 돌보는 한 해 보내세요"

등록 : 2018.01.01 04:40

이암의 '모견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안녕하세요. 저는 고든 세터이기도 하고 부비에 데 플랑드르이기도 합니다. 유럽 어느 명문가의 자제냐고요? 족보에 따라 골든 리트리버이기도 하고요, 닥스훈트로 불리기도 합니다.

아이리쉬 소프트코티드 휘튼 테리어라는 긴 이름이 붙기도 하고, 진돗개라는 호칭을 얻은 경우도 있습니다. 저를 지칭하는 이름만 400개 가량입니다.

아시죠? 짧게 말하면 저는 개입니다. 개라는 호칭을 입에 올리니 괜스레 얼굴이 후끈거립니다. 왠지 뒤에 새끼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은 분이 계실 듯해서입니다. 낳은 지 얼만 안 된 짐승을 가리키는 새끼가 욕이 되는 경우가 동물 중에서 몇 있습니다. 돼지와 저 정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멍멍이라는 말이 좋고, 최근 유행하고 있는 댕댕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듭니다. 댕댕이는 멍멍이를 잘못 읽으면서 만들어진 온라인 신조어인데, 꼬리를 흥겹게 흔들거리는 제 모습을 나타낸 의태어 같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가 꼬리를 ‘댕댕’거리며 새삼스레 제 소개를 하는 이유는 저에게는 특별한 새해가 밝아서입니다. 올해는 저의 해, 무술년(戊戌年)입니다. 황금 개띠 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계보’ 있는 단어 같지는 않습니다. 황금을 뜻하는 무(戊)가 개를 의미하는 술(戌)과 만났으니 황금 개띠 해라는 주장이 있는데, 무가 그저 붉은 색을 의미할 뿐이라는 반박이 강하기도 합니다. 2007년엔 황금 돼지띠 해라고 해서 다른 해보다 사람들이 아기를 많이 낳았고 유통업계가 제법 재미를 보기도 했습니다. 황금 개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으나 돈을 번다는 뜻의 ‘파차이’(發財)와 발음이 비슷해서 8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재물의 해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좀 유식한 척 한 것 같은데, 다 사람들과 오래 산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가축화된 시기는 1만년 전쯤으로 추정됩니다. 사람들이 수렵에서 농경으로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면서 안정적으로 고기를 공급 받고 싶어서 저를 기르게 됐다고 합니다. 미국 인류학자 팻 시프먼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인간이 수렵시절 늑대와 맺은 동맹이 제 조상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빙하기 시절 사람과 늑대가 함께 사냥에 나서면 20~100㎏짜리 큰 동물을 더 손쉽게 잡을 수 있었고 사냥 시간도 57%나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푸른숲 발행 '침입종’).

만남의 이유야 어쨌든 사람과 가장 친밀한 동물은 분명히 저입니다. 개의 학명은 ‘Canis lupus familiaris’입니다. ‘Canis lupus’는 회색늑대를 뜻하는데, 제 조상이 이들이라는 걸 학명으로 알 수 있습니다. ‘Familiaris’는 라틴어로 아주 친밀한 손님이나 하인을 의미합니다. 가족처럼 매우 가깝다는 뜻을 지녔는데, 개의 학명은 결국 ‘가족과도 같은 회색늑대’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라면 누구의 가족이겠습니까. 우주가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착각하곤 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봤을 때 사람 입장에서 가족과도 같다는 거겠지요. ‘Familiaris’가 학명에 붙은 생물은 저 밖에 없습니다. 제가 사람과 가장 가깝다고 단언하는 이유입니다.

김홍도의 '투견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람들이 저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건 당연하기도 합니다. 집과 재산을 지켜주고, 사냥의 동반자로 산야를 함께 누비다가 노을을 함께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할 수 있는 동물은 지구에서 저희 밖에 없습니다(심지어 한국에서는 고기까지…). 독일 유명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가 만든 다큐멘터리 ‘해피 피플: 타이가에서 보낸 1년’(2011)을 보시면 저의 존재의 이유를 절감하실 겁니다. 러시아 시베리아 동토에 사는 사람들이 개에 얼마나 의지하며 행복한 삶을 사는 지 알 수 있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 속에서 한 사냥꾼은 제야를 집에서 보내기 위해 스노모빌(설상차)을 타고 150㎞을 쉼 없이 달립니다. 사냥꾼의 개도 쉬지 않고 150㎞을 뜁니다. 저의 품성과 본능을 온전히 담고 있는 장면입니다. 개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정직하고 지적이며 일관적이라고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쓸모 있고 충성스럽게 오래도록 곁에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 놈’, ‘개 같은 놈’, ‘개판’을 입에 자주 올립니다. 저보다 실생활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고양이를 빗댄 욕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서운합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 너무나 가까이 있으면 그 귀함을 잊는 듯합니다. 공기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평소 고마워하지 않는 것처럼요.

올해가 저의 해이니 저의 영원한 사랑, 사람에게 덕담을 전하고 싶습니다. 가깝고도 흔해 무시하고 살아왔던 것들을 새삼 돌아보며 사는 한 해를 보내시라고요. 새털 같은 시간을 아끼고 가족을 사랑하며 주변에 감사하라고요. 그럼 아마 복 많이 받으실 거라고요. 그럼 분명 황금 개띠 해가 될 거라고요.

라제기 문화부장 wenders@hankookilbo.com

불교 행사에 사용되는 도량장엄의 하나인 십이지신번 중 초두라대장을 그린 그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용맹한 개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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