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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에 빠진 2030... 작은 성취가 된 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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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에 빠진 2030... 작은 성취가 된 요행

입력
2017.01.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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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방 두달새 260여곳 늘어

미집계 포함하면 폭발적 증가세

뽑기 성공에 자신감 등 생기고

경품이 가져다 주는 안식은 덤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는 시대

요행의 즐거움이 확산된 현상”

세 가락 집게 손이 6면이 막힌 통 속의 인형을 집었다. 섬세한 조작능력과 어느 정도의 운이 어우러져야 저 인형은 세상 밖으로 나와 그대 품에 안긴다. 그 사소한 짜릿함이 자칫 중독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세 가락 집게 손이 6면이 막힌 통 속의 인형을 집었다. 섬세한 조작능력과 어느 정도의 운이 어우러져야 저 인형은 세상 밖으로 나와 그대 품에 안긴다. 그 사소한 짜릿함이 자칫 중독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긴장된 표정으로 1,000원을 지폐 투입구에 집어 넣는다. 곧 집게가 부드럽게 움직인다. 최근 국민 캐릭터로 떠오른 ‘라이언’ 인형의 몸통보다 한참 큰 녀석의 머리 부분을 공략해 본다. 들어올리기는 성공인데 허공의 3분의 2 지점에 다다르기도 전에 떨어지고 만다. 다시 한 번 시도. 이번에는 목표지점으로 이동하는 도중 허무하게 낙하한다.

잇따른 실패에 약간 좌절한 표정으로 인형들을 노려보고 있자, 옆 기계에서 게임에 집중하고 있던 초등학생이 무심한 듯 친히 “몸통을 잡아야 돼요”라고 일러준다. 아이의 말을 경청하는 어른의 아량을 보여 이번에는 몸통 부분을 노린다. 판 위에 안착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라이언의 겨드랑이가 출구에 걸린 게 문제다.

한 번만 더 시도하면 호박모자를 뒤집어 쓴 라이언 인형이 금방이라도 품 안으로 뛰어들 것 같다. 딱 한 번만 더해야지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처음에 바꾼 1,000원짜리 지폐 열 개가 어느새 바닥났다.

지난 주말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인형뽑기가게에서 재미 삼아 시도했던 기자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밝은 형광등 밑에 드러난 그 귀여운 눈 코 입, 조이스틱을 섬세하게 조종하는 손맛, 집게를 내려 보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지갑에 있던 5만원을 깼어야 했을까. 분명 한번만 더 시도했으면 호박모자를 쓴 라이언이 품에 안겼을 텐데. 내가 이러려고 뽑기방에 들어섰나 자괴감마저 든다. 돌아오는 주말, 다시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나서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다.

뽑기가 어린이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났다

최근 ‘100m마다 하나씩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뽑기방’ 열풍이 거세다. 어린 시절 동네 문방구 앞에 쪼그려 앉아 100원을 넣고 장난감이 든 캡슐을 뽑던 기억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피규어, 열쇠 고리, 소형 장난감 등이 담긴 캡슐을 뽑는 기계를 매장 전체에 구비한 ‘가챠(ガチャ)샵’이 대세다. 가챠는 작은 캡슐 안에 담긴 장난감이 들어 있는 무작위 뽑기 기계의 손잡이를 돌릴 때 나는 ‘찰칵찰칵’ 소리의 일본식 표현인 ‘가챠가챠(ガチャガチャ)’에서 유래했다. 여기선 뽑기방이라 통칭한다.

뽑기방은 전주 한옥마을, 인천 차이나타운은 물론 제주까지 시장을 넓혀 전국 매장만 60개에 달한다. 게임제공업소의 사후관리를 맡고 있는 게임물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전국 게임제공업소 중 상호에 ‘뽑기’란 단어가 들어간 업소 수는 지난해 9월 147곳뿐이었지만 10월 말에는 415곳으로 늘어났다. 집계에 포함되지 않은 숫자를 감안하면 폭발적인 증가세다. 원격 조작으로 인형을 뽑고 택배로 배달 받는 사이트까지 등장했으니 과연 뽑기의 세계는 상상 이상으로 넓은 셈이다.

뽑기 열풍이 이토록 세를 불린 건 성인들 덕이다. 뽑기방이 전국 대학가 중심으로 퍼지는 것도 20대 이상 소비층의 지갑을 노렸다는 증거다.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이나 퇴근 시간 짬을 내 회사 인근 뽑기방을 들르는 것도 새로운 풍경이 됐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서는 배우 이선균(42)과 오윤아(37)가 동네 어귀에서 인형 뽑기를 하다가 뽑은 인형을 건네며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뽑기는 더 이상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닌 셈이다.

서울 강남구의 한 뽑기방에서 20대 남녀가 어떤 인형을 뽑을지 고심하고 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서울 강남구의 한 뽑기방에서 20대 남녀가 어떤 인형을 뽑을지 고심하고 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탕진과 성취의 미학, 뽑기

다 자란 어른들까지 현혹하는 뽑기의 매력은 무얼까. 신조어로 등장한 ‘탕진잼’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소소한 곳에 아낌 없이 돈을 쓰는 재미를 뜻하는 탕진잼은 보통 1,000원에서 1만원이면 즐길 수 있는 뽑기가 제공하는 기쁨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강남역의 한 게임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최모(29)씨는 4일 “고객층의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요즘은 30대가 가장 많은 편”이라며 “인형을 그냥 돈 주고 사려면 1만~2만원이지만 10분의 1 가격으로 인형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이득이라고 느끼는 손님들이 많은 것 같다. 5만원짜리를 교환하는 사람도 많고 보통 몇 만원 정도는 쿨(cool)하게 쓰고 간다”고 설명했다. 이곳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 이모(29)씨는 “당구장이나 PC방 가는 것보다 덜 비싸고 남는 것(인형)도 있지 않느냐. 친구 셋이 모이면 1만원 정도 쓰는데 돈,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다가 뽑기에 숨어 있는 키워드는 ‘성공’이다. 구직, 직장 일 등 현실에서 풀리지 않는 성취욕을 뽑기에서 찾는다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직장인 김모(28)씨는 “예전엔 인형 뽑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일상에서라도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에 주기적으로 뽑기를 하게 됐다”고 했다. 주변에 모여든 낯선 이들이 “잘 한다” “성공하겠다” 등의 추임새를 넣어주면 일터에서 바닥을 치던 자신감도 샘솟는다는 것이 김씨 설명이다.

이런 심리를 노린 것인지 공시생(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모이는 서울 노량진역 인근에는 유난히 뽑기방이 즐비하다. 노량진역 인근 반경 1~2㎞ 안에만 8개의 뽑기방이 성업 중이다. 경찰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는 박모(28)씨는 “이 공부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답답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런데 뽑기는 비교적 적은 돈을 들여서 금방 눈에 보이는 걸 얻을 수 있지 않냐”라면서 “주변에도 시험 준비 스트레스를 뽑기로 푸는 친구들이 꽤 있다”고 귀띔했다.

귀엽고 예쁜 경품이 가져다 주는 안식은 덤이다. 여가와 소비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복고, 키덜트(어린이문화를 즐기는 어른) 현상 등이 뽑기가 유행할 수 있는 지렛대 작용을 한 셈이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뽑기방을 즐겨 들른다는 김모(29)씨는 “기계에서 꺼낸 인형을 보면 한없이 귀여워 기분이 좋아진다. 인형을 뽑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뽑은 인형이나 피규어를 진열하거나 주변에 나눠주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것이 뽑기를 즐기는 이들의 얘기다.

적은 돈을 탕진하고 그에 따른 소소한 성취에 기뻐하는 뽑기 열풍. 그 기저에는 무너진 업적주의의 이상과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성공과 노력의 상관관계가 헐거워진 틈을 타 요행이 주는 즐거움이 확산된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무리 고생하고 노력을 해도 성공할 수 없는 시대에는 일종의 체념주의, 패배주의가 퍼지게 된다. 뽑기 열풍은 불황기에 도박이 늘어나는 것과 유사한데, 노력해서 이룰 것이 없을 바에야 즉각적인 결과를 얻고 말자는 심리의 일종”이라고 진단했다.

“한 달에 50만원 쓴다” 도박에 버금가는 뽑기 중독도

뽑기도 중독이 될까. 이 남자를 보면 답은 ‘절대 그렇다’이다. 인형 뽑기에 지나치게 집착해 아들의 용돈까지 손을 댄다며 19일 방송프로그램 ‘안녕하세요’에 등장한 출연자의 사연이다. 아내는 “한 달에 50만원은 인형 뽑기에 쓴다”라면서 “치킨집을 하는 남편이 인형 뽑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 빠져 치킨을 튀기다가 끓는 기름에 손을 넣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뽑기가 인기를 끄는 현상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집착으로 인해 뽑기 기계나 경품을 절도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물론 불법 기계 설치까지 판을 치기 시작하고 있다. 단순 오락과 취미로 보기에는 뽑기가 안고 있는 사행성도 무시 못할 수준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전문가들은 뽑기의 사행성이 도박에 버금간다고 보고 있다. 뽑기 역시 도박과 마찬가지로 경위와 경과가 불확실한 사건이나 활동에 돈이나 그에 상응하는 것을 걸어 요행을 바라는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넓은 범위에서는 도박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는 청소년 대상 실태조사에서도 드러난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소년이 하는 돈내기 게임 중 ‘뽑기 게임’을 한 청소년이 도박 위험군(34.1%)과 문제군(20.8%)에 속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임정민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예방교육과장은 “바다이야기나 유희왕 카드놀이도 처음에는 건전한 게임에서 시작됐지만 확률 조작, 환치기가 등장하면서 사회병폐현상이 됐다. 뽑기도 점점 정교함을 갖출수록 도박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불법으로 개ㆍ변조된 기계나 상한금액 이상의 경품을 통해 사행성을 불어넣어 소비자를 농락하는 업주들도 골칫거리다. 게임제공업소의 사후관리를 담당하는 게임물관리위원회는 이런 문제가 심각해지자 지난해 11월 ‘크레인 게임물 세부 검토 기준’을 마련했다. 집게, 봉, 밀어내기 판 등을 버튼이나 레버를 조작해 경품을 획득하는 크레인류 게임물은 이용자에게 동일한 기회와 조건을 부여할 수 있는 난이도를 설정해야 하고, 이용자가 이를 숙지할 수 있도록 기기 전면에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획득 경품을 환전 또는 환전 알선하거나 다른 물품으로 교환하는 등의 사행성 조장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실제로 지난달 전국 뽑기방 중 144곳을 무작위로 골라 실태조사를 한 결과, 기계 개ㆍ변조 12곳, 경품위반 8곳 등 101곳이 불법영업으로 적발됐다.

게임물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집게가 움직이는 도중 중간부터 압력이 낮아지도록 개ㆍ변조하거나 5,000원 이상의 경품 또는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는 경품을 제공하면 전부 불법”이라고 강조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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