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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의 끝 모를 진화

입력
2015.10.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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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놈이다'의 유해진. CGV아트하우스 제공
영화 '그놈이다'의 유해진. CGV아트하우스 제공

1997년 유해진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처음 접했다. 첫 인상은 무지막지했다. 비리 형사 오세근(최민수)과 도로에서 시비가 붙은 덤프트럭 운전사 역할이었다. 오세근의 차 앞창에 우유팩을 던져 운전을 방해하는 모습이 불량하기 그지 없었다. 얼굴이 뚜렷하게 머리에 새겨지지 않았으나 살벌하다는 인상은 남았다.

몇 년이 흘렀다. ‘주유소 습격사건’(1999)에서 그 얼굴(사실 그 얼굴인지 알아채지는 못했다)을 또 봤다. 영락 없는 동네 양아치. 후배들을 이끌고 이곳 저곳 들쑤시며 시비를 거는 불량배로 보였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한 주연배우가 “스태프가 촬영장 근처에서 긴급히 찾은 동네 불량배인줄 알았는데 연기를 잘해 놀랐다”고 말할 정도였다(유해진은 외모 때문에 연극영화과 시험에서 세 번이나 떨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엘리트 악역’의 변신

유해진은 천상 악역을 벗어나기 어려운 외모다. 두툼한 입술과 슬쩍 째진 눈, 저돌적인 형세의 코, 거무튀튀한 피부 등 때문에 주연과는 거리가 먼, 조연을 해도 악역을 해야 할 운명처럼 보였다. 험상궂은 외모를 변주해 웃음을 빚어내는 감초배우 정도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처럼 여겨졌다. 악역으로 타고난 외모인 유해진이 신작 ‘그놈이다’에서 악역을 맡았다고 화제다. 유해진이 연기한 민약국은 아픈 상처를 지닌 연쇄 살인마다. 냉철하면서도 주도면밀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인물. 팔색조 연기를 보인 유해진이라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유해진의 오랜 연기 이력이 만들어낸 지독한 역설이다.

유해진은 대중의 예상대로 악역을 거쳐 코믹 배우로 자리잡았다. ‘공공의 적’에서 꼭 낀 바지를 입은 칼잡이 역할을 하며 “요것이 사시미여, 쑤실 때 쓰는 거이고…”라는 험악하면서도 코믹한 대사를 능청스레 내뱉으면서 영화 속 감초로 거듭났다. 왕궁 비사를 그린 ‘왕의 남자’에서도 육갑으로 분해 웃음을 담당했다. 수다스럽기 이를 데 없는 도박꾼 고광렬(‘타짜’)도 대중의 눈길을 훔치기 충분했다. 유해진표 감초 연기의 절정은 지난해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었다. 866만명 가량이 본 ‘해적’의 흥행에 유해진이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누군가에게 당하기만 하는 ‘억울한’ 소시민적 역할도 유해진에겐 제격이었다. 유해진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됐던, 그러나 흥행에선 죽을 쒔던 스릴러 ‘트럭’(2007)을 들 수 있다. 심장병 딸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시체를 옮기다가 연쇄살인범을 태우게 된, 억세게 재수 없는 트럭운전사 철민을 연기하며 순박한 역할의 가능성을 열었다. 악하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이 범죄의 세계에 접어들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철민의 모습은 ‘이끼’(2010)에서 김덕천으로 진화한다. 한 마을에서 어두웠던 과거를 지우고 이끼처럼 숨어살던 김덕천이 마을의 비밀을 캐내려는 유해국(박해일)에게 쏟아내는 신들린 항변은 스크린을 장악한다. 이야기 주변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시선을 훔쳐내며 ‘신 스틸러’의 면모를 확연히 드러낸다.

순박하고 섬세한 남자

유해진의 진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tvN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에 출연하며 마음 씀씀이가 넉넉한 동네 아저씨 같은 친숙한 이미지까지 구축한다. 외모에서 비교할 수 없는 배우 차승원과 부부처럼 옥신각신하며 정을 주고 받는 모습으로 그는 스크린 밖 호의적인 이미지를 튼실히 쌓았다. ‘삼시세끼’를 발판으로 자본주의의 첨병 산업이라 할 수 있는, 그래서 미모의 남녀가 독차지하기 마련인 신용카드 광고 모델로까지 신분 상승한다(유해진과 짝을 이루는 여자 모델이 이나영이다! 2,3년 전만 해도 서민적인 감초 배우가 카드 광고까지 하게 될 줄 예상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유해진의 훈훈한 면모는 오래 전부터 스크린 밖에서 형성됐다. 서울예술대학 연극학과에 진학하기 전 의상학과에 잠시 다녔다는 점, 뜨개질과 그림 그리기가 취미라는 사실 등은 영화 속 배역이나 외모와 달리 꼼꼼하고 섬세한 남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미모의 스타배우 김혜수와의 열애도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과연 어떤 남자이길래’, ‘어떤 매력을 지녔기에’라는 궁금증은 유해진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 악역이나 감초배우, 순박한 한 인물을 주로 맡았던 유해진에게 김혜수와의 사랑은 변신의 전환점이 됐다.

역할은 사뭇 달라졌다. 뒷골목의 평면적인 악역을 연기하거나 웃음을 파는 배역에서 벗어나 좀 더 복합적인 인물로 변했다. 영화 ‘부당거래’(2010)에서 그는 경찰의 용의자 조작에 동참하는 뒷골목 비정한 사업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수의견’(2015)에선 486세대 출신의 이혼 전문 변호사이나 가슴 바닥에는 의기가 살아있는 대석을 연기했다. ‘극비수사’(2015)에서는 신념을 지닌 무속인 김중산을 맡아 웃음기 거둔 진지한 배역을 소화했다.

주연급 악역으로의 변모

서서히 만들어진 진지한 이미지는 ‘베테랑’에서 빛을 발한다. 상류층과는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었던 유해진은 결혼으로 재벌가에 편입된 최상무를 연기한다. 재벌가에서는 비주류이기에 서자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의 갖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지만 이전에는 유해진이 할 수 없었던 사회 지배층 역할이다.

유해진의 변곡 많았던 연기 이력을 돌아보면 신작 ‘그놈이다’의 변신 아닌 변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원래 악역이었으나 어느 순간 악역을 맡을 수 없는 인물로 대중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 그의 얼굴 앞에 붙던 ‘험상궂은’이라는 수식은 ‘개성 넘치는’으로 바뀌었고 배우 앞에 오던 감초라는 수식은 연기파로 변했다. 나쁜 역을 맡아도 예전과 달리 세련된 수법을 사용하는 악역을 맡을 수 있는 이미지를 구축한 셈이다. 순박하고 친절하고 순수하고 섬세해서 훈훈하기만 한 것으로 여겨졌던 남자 배우가 한적한 어촌의 유지인 약사를 가장한 싸이코패스를 연기하게 됐으니 대중은 연기 변신으로 받아들일 만도 하다.

잘 생긴 배우는 연기를 잘할 때까지 대중이 기다려준다. 데뷔 초기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던 이병헌과 장동건, 원빈이 대표적이다. 외모가 자산이 아닌 배우들은 데뷔 때부터 연기력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악역과 감초로 소비되다 어느덧 냉혹한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는 경우가 태반이다. 천상 악역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유해진이 예정된 코스처럼 악역과 감초를 거쳐 예상과 달리 주연급으로 변모해온 과정은 흥미롭다. ‘그놈이다’에서 그가 맡은 주연급 악역 민약국이 더 눈길을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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