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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끼지 않을 존재는 없다” 이민족에 자비 베푼 하나님

입력
2018.07.07 10:00
수정
2018.07.07 10:3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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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민족인 니느웨가 회개하자 

 예고했던 재앙 거두고 용서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겐 모두가 자녀 

 아무 조건없이 용서하셨기에 

 인간은 구원을 받아 

 종교와 혐오는 상극의 단어 

 둘이 만나면 항상 재앙 불러 

 

기원후 4세기 이탈리아 로마 카타콤(지하묘지)에 그려진 그림. 이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님에게 화가 난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다 바다에 던져지고 있다.
기원후 4세기 이탈리아 로마 카타콤(지하묘지)에 그려진 그림. 이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님에게 화가 난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다 바다에 던져지고 있다.

그리스도인, 그들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라 여기며 읽는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만이 아주 컸던 자다. 대략 기원전 800~750년쯤에 활약하던 예언자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경악했다. 타민족, 타종교, 역사적 원수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정통 종교 지도자였던 요나에게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던 일이었다.

 요나, 차별없는 사랑을 비판하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오래 전,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기 민족만을 위한 신, 자기들만 사랑하는 신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따지고 싶을 만큼 서운한 일이 많았다. 이방 사람, 특히 니느웨가 자기들을 너무나 괴롭혔기 때문이다. 요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나님. 당신을 믿지도 않는 타종교인 니느웨를 돌보시기에 앞서, 당신을 믿고 사는 이스라엘부터 먼저 챙기시지요.”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다.

그래서 요나는 도망갔다. 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나님이 명령했는데, 요나는 배를 타고 다시스, 지금의 스페인이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를 니느웨로 끌어다 놓았다. 그는 싫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요나 3:4) 요나서 전체에서 그가 외친 예언은 딱 이 한마디뿐이다. 참 성의 없다. 그리고는 요나의 염려대로 니느웨 사람들, 왕까지도 다 회개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니느웨를 용서하신다. 요나에게는 눈 뜨고 못 볼 꼴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니느웨 사람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3:10)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들이 무서운 재앙도 피하고 다 같이 행복하고 좋았을 일인데, 예언자 요나는 그게 그토록 싫었을까? 그의 볼멘소리도 들어보자.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4:1-2) 참으로 어이없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 사랑으로 남 잘되는 것은 보기 싫다는 것인가? 그의 지독한 국수주의가 얼마나 막무가내인지, 다음 구절을 보라.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3)

 지나친 의로움도 죄다 

사실 이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전통 가운데에 꽤 심도 있게 다루어졌었다. 하나님은 결국 누구나 다 사랑하시는 걸까? 그럴 것이면 지금껏 남다르게 고생해가면 하나님을 따랐던 나는 뭔가? 불공평한 것 아닌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 가운데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경은 아니고 ‘아브라함 전서(The Testament of Abraham)’라는, 위경에 있는 이야기다. 기원후 1~2세기쯤에 적혀진 이야기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송받는 아브라함이 죽을 때가 되었다. 천사가 그에게 와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 같이 하늘나라로 가자고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떠나기 아쉬워하며 한 가지 소원을 말한다. 세계일주가 아브라함의 버킷 리스트의 제1 순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천사와 함께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 정도면 이 정도 특권을 누릴 수 있었나 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브라함이 지나치게 의로웠던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죄인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견디지 못하고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 아닌가. 죄악을 보다 못해 아브라함은 그가 만난 죄인들을 다 멸망시키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천사에게 세계 여행을 멈추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다. “아브라함은 죄를 모르는 사람이지. 그래서 죄인들에게 긍휼이 없구나. 하지만 이 세상은 내가 만든 곳.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아.”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죄인들을 향한 자기의 무지막지한 분노를 뉘우친다.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사랑하는 자녀들이다. 늘 반듯한 아이보다는, 오히려 삐딱한 아이가 어미에겐 더 눈에 밟히지 않을까? 그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사람을 대해야 하는 태도는 정죄가 아니라 자비여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다.

비록 정경에는 없지만, 지금까지 유대-기독교 전통 속에 잘 보존되어 있는 이야기다. 사실 지금의 신앙인들도 이 이야기 속의 아브라함과 같은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아브라함만큼 의롭지도 않지만, 쉽게 남들을 판단부터 한다. 솔직히 나 자신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녁 뉴스를 볼 때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기사를 볼 때마다, 조금 있는 긍휼마저 증발시켜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어머니’이라 하신다.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나” 

다시 요나에게로 가보자. 혐오스러운 니느웨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입자, 요나는 불만을 가득 안은 채 니느웨 외곽으로 떠나가 은신한다. 그러자 하나님이 박 넝쿨을 요나의 머리 위에 마련해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편안하고 기분이 무척 좋았다. 다음날, 벌레 한 마리가 넝쿨을 갉아먹자 곧 시들고 만다. 해가 떠서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자, 그는 또 이렇게 하나님께 말한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요나에게 묻는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했다.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4:8-9)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이 하신 대답을 들어보자.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0-11)

요나서는 느닷없이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후에 있을 법한 그 어떤 대화도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결국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만 귓가에 울리게 된다. 좌우도 가리지 못하는 개념 상실한 사람이라도, 마을에 돌아다니는 개나 소라도, 하나님이 아끼지 않을 존재가 이 땅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들을 낳은 어머니라면 말이다.

미국 뉴욕 맨하튼 유대교 신학교 앞에서 개신교도들이 유대인 혐오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개신교도의 혐오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똑똑히 지켜봤음에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사랑의 예수를 따르겠다는 이들이 말이다.
미국 뉴욕 맨하튼 유대교 신학교 앞에서 개신교도들이 유대인 혐오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개신교도의 혐오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똑똑히 지켜봤음에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사랑의 예수를 따르겠다는 이들이 말이다.

 혐오는 그리스도 부정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아서 일까? 일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을 혐오하기에 앞장서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정말 혐오스러운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이 그 누구를 혐오한다 하더라도, 교회만큼은 절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아무 조건 없이 용서를 하셨기에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그런 신앙인들이 누군가에게 ‘조건’을 두어 판단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원시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구약성서 일부에는 무언가 혐오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라 믿는 자들이다. 성경의 어느 부분이든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조명하여 해석해야 함을 믿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혐오에 앞장선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버린 원시인임을 스스로 밝히는 꼴이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자비, 긍휼이 아니었다면, 그 실존 자체가 부정될 이들이 기독교인이다.

종교가 혐오를 만났을 때,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재앙을 일으켰다. 절대 서로 어울려서는 안 될 두 단어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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