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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자본론은 실패작… 좌파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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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자본론은 실패작… 좌파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버려야”

입력
2018.04.27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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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맞아

‘위대함과 환상 사이’ 번역

“인류해방 노력 마르크스 위대함

끊임없는 노선 변경에서 나와…

사상 맹종은 현실 제대로 못 봐”

마르크스를 분투하는 멧돼지에 비유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마르크스의 사상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학자가 아니었다. 손에 든 빨간 책은 ‘Karl Marx : Greatness and Illusion’ 원서. 고영권기자.
마르크스를 분투하는 멧돼지에 비유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마르크스의 사상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학자가 아니었다. 손에 든 빨간 책은 ‘Karl Marx : Greatness and Illusion’ 원서. 고영권기자.

“경제학적으로 ‘자본론’은 미완성이 아니라 실패한 책이다, 철학적으로 마르크스는 유물론자가 아니라 독일 관념론의 전통 위에 서있다, 정치학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만 고집한 게 아니라 노선이 계속 바뀌었다는 게 저자 주장의 핵심입니다.”

이 정도면 마르크스주의의 밑둥을 베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뿌리째 뽑아버리자는 얘기다. 마르크스주의의 신학대전 ‘자본론’을 부인하다니 사문난적(斯文亂賊) 아니냐는 농담에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은 한술 더 떴다.

“세계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마르크스주의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옳았다!’고 외치더군요. 전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일이라 봅니다. ‘자본론’은 공황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도 못한 책일뿐더러, 우파 중에 오늘날 시장경제를 얘기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 ‘국부론’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 봤습니까. 좌파는 왜 아직도 ‘자본론’입니까. ‘정통’ 마르크스주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버려야 21세기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서울 서교동 사무실에서 만난 홍 소장 손엔 빨간 책이 들려 있었다. 영국 역사학자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가 2016년 내놓은 ‘Karl Marx: Greatness and Illusion’이다. 5월 5일 카를 마르크스(1818~1883) 탄생 200주년을 맞아 아르테 출판사에서 ‘카를 마르크스 - 위대함과 환상 사이’라는 제목으로 서점에 내놓을 예정이다. 홍 소장이 번역했다.

번역서의 옮긴이 글엔 대개 의무감이 느껴진다. 책의 필요성을 설명해야 해서다. 하지만 한 호흡에 쓴 듯한 홍 소장의 글은 ‘나는 왜 마르크스주의를 저격하는가’로 읽어도 손색없다. ‘징후적 독해’로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를 재건하겠다던 루이 알튀세르를 “마르크스 해석의 지옥문을 열어젖힌 이”라 비판할 때는 무척이나 통쾌하다. 마르크스를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게 이 방향으로 저 방향으로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돌진하고 쓰러지고, 또 돌진하고 쓰러졌다”고 한 대목에서는 웃음이 빵 터진다. 공자 신화를 해체하는 리링 베이징대 교수가 ‘집 잃은 개’(글항아리)에서 공자를 ‘상가구(喪家拘)’, 곧 ‘빌어먹을 것 찾아 상가집이나 기웃대는 개’라 부른 것에 덧댈만한 비유여서다. 홍 소장은 인터뷰에서는 ‘시시포스’라는 비유를 강조했으나 ‘선불 맞은 멧돼지’라는 표현은 안 잊혀진다. 오해를 피하자면 리링과 홍 소장 둘 다 공자와 마르크스의 위대함은 부인하지 않는다. 포인트가 다를 뿐.

카를 마르크스. 그를 이상화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인류에게 지혜를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했다. 하지만 홍기빈이 보기엔 인류해방을 위해 매진했던 시시포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카를 마르크스. 그를 이상화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인류에게 지혜를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했다. 하지만 홍기빈이 보기엔 인류해방을 위해 매진했던 시시포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떻게 번역하게 됐나.

“출판사 제안 전에 이미 한번은 읽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마르크스에 대한 신비주의가 강한 편이어서 꼭, 어서 빨리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번역하면서 한층 더 꼼꼼히 읽었다. 마르크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할 책이다. 이 책보다 좀 일찍 나왔던 조너선 스퍼버의 ‘카를 마르크스 - 19세기의 삶’도 괜찮다. 19세기 당대의 맥락에서 마르크스를 읽자는 방향은 비슷하다.”

-당대 맥락이란 어떤 의미인가.

“마르크스 전기를 7~8권 정도 봤는데 그 중 괜찮은 책으로는 이사야 벌린이 1934년에 쓴 ‘칼 마르크스’(미다스북스)를 꼽을 수 있다. 잘 썼다. 다만 마르크스를 헤겔에 버금갈 정도로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일관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려냈다는 문제가 있다. 소련이 망하고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은 깨졌지만, 일관된 체계적 사상가라는 마르크스에 대한 환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책은 벌린이 만든, 아직까지 짙게 남아 있는 그 이미지를 극복하고 해체하는 작업이다.”

-‘자본론’은 실패작이라고 했다.

“1권을 쓴 뒤 마르크스는 더 이상 자본론 원고에 손대지 않는다. 2, 3권을 빨리 내라는 주변의 독촉에 병 핑계를 대고 그러는데, 실패했기에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보는 게 맞다. 원래 자본, 노동, 토지소유, 국가, 세계무역, 세계공황 등 6권을 써서 자본주의의 등장, 성장, 몰락, 사회주의의 도래를 보여주겠다 약속했다. 엥겔스는 2, 3권을 편집하면서 그런 책이 나올 것이라 공언하기도 했다. 아직도 ‘자본론’을 읽지 않은 이들은 그런 내용이 있는 줄 안다. 그런데 1권 쓰다 막힌 거다. 이해되는 면도 있다. 당대의 고고학, 인류학, 경제학 수준 등을 감안하면 한 명의 학자가 다 감당해내긴 어려운, 너무나 원대한 계획이었다. 1860년대 중반쯤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1870년대 들어서는 보편적 역사 발전 법칙이 있는 지도 의심하게 된다. 한편으론 그래도 마르크스가 한번 들쑤시자 고대 경제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본격화됐다. 선구자인 셈이다.”

-자본주의 몰락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 있지 않은가.

“심정적으로는 마르크스도 경향적 저하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3권을 보면 경향적 저하뿐 아니라 반대 경향도 나온다. 어느 쪽이 우세한가를 단언하지도 못한다.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정직한 연구자다. 결론을 짜맞추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니 원고만으론 경향적으로 저하한다는 것인지, 안 한다는 것인지, 그래서 자본주의가 망한다는 것인지. 자본주의 다음에 어떤 사회가 온다는 것인지 모든 게 모호하다. 그래서 1894년 3권이 출간되면서 마르크스주의 진영은 대혼란에 빠진다. 나중에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망한다는 건 경제주의적 편향이고, 계급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딴 소리를 하게 된다.”

198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상을 다룬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진보적인 이들은 이 책을 열심히 읽어나갔다. 홍기빈이 보기에 이 책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 마르크스와 절연하는, 아이러니의 산물들이었을 뿐이다. 한국일보 자료자신
198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상을 다룬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진보적인 이들은 이 책을 열심히 읽어나갔다. 홍기빈이 보기에 이 책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 마르크스와 절연하는, 아이러니의 산물들이었을 뿐이다. 한국일보 자료자신

-이런 얘기들은 많이 듣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무관하다’ ‘사실 엥겔스가 만들었다’는 얘기는 이미 1950년대부터 서구학계에서 나왔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사실 엥겔스가 쓴 ‘반듀링론’ 같은 책의 영향력이 더 컸다. 조악하지만 엥겔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1880년대에는 독일 사민당이 최대 정당으로 부상하는데, 불법화됐다. 이 상황에서 ‘조금만 기다려라, 우리를 억누르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곧 무너지고야 만다’라고 말할 필요성이 있었다. ‘독일 사민당 맞춤형 마르크스주의’를 만들어낸 것이다.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마르크스’를 찾아 나서는데 1970년대부터는 이마저도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마디로 실패작인데 더 들여다봐야 뭐하느냐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연구 역사가 일천한데다, 서구의 이런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데도 인색했다.”

-마르크스가 관념론자라는 얘기도 놀랍다.

“유물론 대 관념론이라는 대립구도는 마르크스 시절엔 없었다. 다윈 이후 생겨난 대립구도에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맞춰 넣은 것이다. 마르크스의 노동에 대한 개념, 노동자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노동자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서 나온 게 아니다. 오히려 칸트, 헤겔처럼 인간의 가능성과 능동성을 긍정하고 강조하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 위에서 내린 철학적 결론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마르크스가 노동과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정치노선의 변화는 어떤가.

“마르크스라면 다들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떠올린다. 안 그랬던 건 아니지만, 실제로는 더 복잡하다. 최대한 압축하자면 1840년대엔 프랑스혁명 같은 걸 꿈꿨다. 로베스피에르, 자코뱅 같은 노선이었다. 1850년대엔 경제적 위기를 중시하는, 공황을 기다리자는 경제결정론자 같았다. 1860년대엔 노조주의자가 된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투표로 정권을 장악하자고 한다. 사민주의가 수정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적통인 이유도 여기 있다. 1870년대에는 더 충격적으로 자본주의 이전 촌락 공동체에 희망을 거는, 러시아의 나로드니끼(인민주의자) 같은 면모를 보인다.”

-정세 변화에 따른 것인가.

“그렇다. 처음엔 소수가 당을 결성, 혁명을 해야 한다 생각했는데 선거권이 보편화됐다. 엘리트들의 비밀결사 말고 노조, 정당 같은 공개적인 대중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봤다.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한 노조의 반동적 태도를 보면서 보편적 역사발전을 향한 대규모 프로젝트에 대한 희망, 기대가 꺾이게 되고 그 결과 러시아 미르(mirㆍ촌락공동체)에 몸을 기대는 낭만주의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다양한 얼굴을 지닌 셈이다.

“그래서 지금도 누구나 자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마르크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 사민주의자들, 낭만주의자들, 심지어 아나키스트들까지도. 그게 모두 마르크스냐. 맞다. 그게 다 마르크스다.“

-산업사회와 가장 친해야만 할 것 같은 진보 인사들이 늙어서는 낙향, 귀농한 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모양새가 특이했는데, 듣고 보니 이해된다.

“그와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베라 자술리치 같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말년의 마르크스에게 편지를 보낸다. 요점은 인민주의를 내세우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멍청이들 때문에 답답하다는 거다. 혁명가들 입장에선 자본주의 이전 촌락공동체에 희망을 거는 인민주의자들을 깨부숴야 한다. 비판해달라는 얘기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뜻밖의 답장을 보낸다. 체르니셰프스키는 훌륭한 사상가며 그의 생각에 자신도 동의한다고.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이때 주고받은 편지를 감춰버린다. 1920년대 들어 마르크스 전집 작업을 하던 다비드 리야자노프가 이 편지의 존재를 알았다. 당시만 해도 관련자들이 살아 있을 때라 직접 물었다 한다. 그랬더니 한결같이 ‘모른다’고 답했다. 추측하건 데 마르크스의 답이 알려지면 러시아 공산당의 정당성이 무너진다 생각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 마르크스와 단절해버리는 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에피소드다.”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 지음ㆍ홍기빈 옮김

아르테 발행ㆍ1,112쪽ㆍ8만원

-서구학계에서도 이 책을 두고 논란이 있나.

“저자인 존스는 19세기 정치사상사의 권위자다.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40여년을 가르쳤고,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에서 19세기 부분을 책임편집한 사람이다. 책 자체를 학문적으로 논박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 켈리니코스 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판하긴 했는데, 그 비판도 내용보다는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쪽에 가깝다. 존스가 젊은 시절엔 ‘뉴레프트리뷰’ 편집위원을 지내는 등 급진 좌파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심정적인 반발인 건가. 이 책은 사실상 그 동안 가장 널리 알려진, 가장 잘 먹힌, 가장 잘 팔린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하는 셈 아닌가.

“나는 오히려 거꾸로 묻고 싶다. 마르크스주의가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게 무슨 무기인가. 오히려 화석화된 마르크스주의 맹종은 존재하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아닌가. 가령 비정규직 철폐 어쩌고 하는데, 비정규직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처우 개선을 위한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건 다 개량주의적이고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뒤집으라고만 한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싸움을 가로막는 행위 아닌가. 좌파라는 이들은 현실을 더 열심히 봐야 한다.”

-이제 마르크스의 관뚜껑이 제대로 닫힐 때인가.

“인류 역사발전의 보편 법칙을 밝혀낸 ‘프로메테우스로서의 마르크스’라면 맞다. 그런 마르크스라면 관 뚜껑에 못을 박아주는 책이다. 마르크스의 가장 큰 교훈은 역설적이게도 산업사회를 인간화하는 일에 정답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는 데 있다. 고정적 이데올로기, 계획보다 과학적으로 관찰해 행동노선을 계속 수정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 인류해방, 노동해방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고 행동했다. 40~50년 동안 끊임없이 그렇게 했다. 동시에 노선 수정이 있을 때마다 가장 우수한, 동의 여부를 떠나 문체를 비롯, 논거나 논리 등의 측면에서 탁월한 1급 수준의 글을 써냈다. 비밀스러운 진리를 알려준 ‘프로메테우스로서의 마르크스’가 아닌, 끊임없이 노력한 ‘시시포스로서의 마르크스’라면 여전히 위대하고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예측불가능한 21세기 산업사회에서는 더더욱.”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개인적 입장도 궁금하다.

“87학번이었고, 2000년 정도까진 나도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살았다. 영국으로 유학간 것도 마르크스주의 공부 때문이었고. 그러나 2000년 이후 신념체계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여전히 진보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지만, 믿어야 할 것은 진보 그 자체이지 마르크스주의라는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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