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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초행(醮行) 혹은 초행(初行)

입력
2018.01.18 16:0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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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이나 시집의 제목을 표제작 없이 독립적으로 정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장석남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2017)를 받아들고는 목차부터 살폈다. ‘입춘 부근’이라는 짧은 시는 창가 식탁에 끓인 밥을 퍼다놓고 달그락거리는 조금은 처연한 풍경 사이로 문득 무심하게 다가서는 봄기운을 그린다. 시의 화자는 식탁 옆 창의 커튼을 내린 모양인데 햇살 들이치는 늦은 아침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시는 다가서는 ‘침침해진 벽’을 부유하는 생활의 둘레로 수용한 뒤 모종의 근심과 흐릿한 의지를 함께 다진다. “오는 봄/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달력을 보니 입춘이 얼마 안 남기도 했다.

김숨 소설집 ‘당신의 신’(2017)도 표제작이 없는 경우다. ‘이혼’이라는 작품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남편의 공격에 대한 아내의 답변이다. 아내는 시인인데 남편은 그 점을 문제 삼고 있다.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누가 보아도 유치한 논리다. 남편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과 좌절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데, 정작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아내의 고통에는 무감하고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결혼이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 일이 아니듯 이혼 역시 누가 누구를 버리는 문제가 아니다. ‘당신의 신’이라는 제목은 이미 충분히 해체되었으리라고 믿고 있는 결혼의 환상이 이상한 윤리적 환상 아래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소설집에서 작가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은 한층 착잡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이른바 ‘폭력의 대물림’을 수반하는 폭력의 역사가 어른거린다. 좀더 분명하게는 남성 가부장제의 폭력인데, 결혼은 그 폭력의 구조를 보존하고 재생산한다. 어릴 적 가정폭력을 겪은 이는 그 폭력을 자기도 모르게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가운데 폭력의 가해자로 성장해간다는 서사도 있다. 이혼 후일담이라 할 만한 소설집 속의 ‘새의 장례식’은 이 서사를 지지한다. 나는 이런 문제가 언제나 개별 사례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믿지만, 폭력의 대물림을 거절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고 상당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일 테다. 어쨌든 ‘이혼’이 통과제의가 될 수밖에 없는 ‘결혼’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김숨의 소설은 좀더 큰 틀에서 결혼제도가 봉착한 딜레마를 건드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성 가부장제의 틀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친밀성의 새로운 관계는 아직 충분히 도착하지 않은 듯하다. 보다는 사회 전체가 일종의 아노미 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도 같다.

연말에 개봉한 김대환 감독의 영화 ‘초행’(2017)은 7년차 동거 연인의 막막한 시간을 뛰어난 현실감으로 전한다. 남자 아버지의 회갑연이 열리는 속초의 가족 현실은 별다른 과장 없이도 이들의 미래를 막아선다. 경제적 문제도 크지만, 가족을 만드는 일은 선뜻 내딛기 어려운 길로 보인다. 두 연인이 내뱉는 새된 숨소리와 간헐적 침묵은 잊기 힘들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이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진행 방향을 찾는 모습은 이상하게 뭉클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쪽으로 합류하고 싶지만 가다보면 반대편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기실 개개의 삶 안에서 모든 길은 초행일 수밖에 없을 테다. 이런저런 명쾌한 진단과 분석은 넘쳐나지만, 정작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을 조망할 자리는 좀체 주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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