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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동파키스탄 독립선언(3.26)

입력
2018.03.26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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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26일 동파키스탄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1971년 3월 26일 동파키스탄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1971년 3월 26일 동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했고, 서파키스탄 정부가 군대를 투입했다. 내전으로 시작된 약 9개월의 ‘방글라데스(동파키스탄) 독립전쟁’에서 300만 명이 숨졌고, 희생자 대부분이 전장이었던 동파키스탄의 민간인이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오랜 유혈 분쟁 끝에 47년 인도 독립과 함께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은 처음부터 억지스러운 국가였다. 이슬람교 신앙을 공유한다고는 하지만, 지리적으로 동ㆍ서파키스탄은 인도대륙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다. 언어도 문화도 피부색도, 심지어 면하고 있는 바다도 서파키스탄의 아라비아해와 동파키스탄의 벵골해로 달랐다. 정치 권력을 독점한 서파키스탄은 예산 투자 등 모든 면에서 동파키스탄을 차별했다. 70년대 초 인구는 동파키스탄(7,500만 명)이 서파키스탄보다 1,000만 명 가량 많았다. 서파키스탄 정부의 동파키스탄 지역 정부는 옛 식민지 총독정부와 다르지 않았다.

독립 직후부터 양측은 갈등했다. 초대 정부 대통령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서파키스탄 언어(우르두어) 공용화를 선언, 동파키스탄의 벵골어 교육 등을 금했다. 48년 벵골어 지키기 운동이 시작됐고, 49년 지역 정당 아와미 연맹이 결성됐다. 그들이 60년대 중반부터 요구한 건 동파키스탄 자치권 확대였다. 군인독재자 아히야 칸의 민정이양 공약에 이은 70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이 과반의석을 석권하면서 정부ㆍ의회 권한을 넘겨줘야 할 판이 된 서파키스탄 정치권은 총선 결과를 무효화했다. 그 결정에는 서파키스탄의 군부ㆍ민간 정치엘리트들의 입장이 일치했다.

아와미연맹 당수 무지부르 라만이 71년 3월 26일 아침 방송을 통해 전면파업과 독립을 선언했고, 그 직후 군인들에 의해 체포돼 서파키스탄으로 압송됐다. 동파키스탄 인들의 무장 봉기와 파견 관료 등에 대한 테러가 시작됐고, 양측의 내전이 본격화했다. 파키스탄과 2차례 전쟁을 치른 인도는 동파키스탄을 뒤로 지원하다가 전쟁 막판에 공식 참전, 항복을 받아냈다. 패전으로 인구 과반과 국토의 1/3을 잃은 파키스탄도, 전장의 폐허에서 건국 작업을 시작해야 했던 방글라데시도 전후 오랜 기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퇴행을 겪어야 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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