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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한국 직장의 군대문화

입력
2018.01.11 16:4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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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영하 12도의 강추위에 신입사원들이 무리 지어 대기업연수원 운동장을 달린다. 매주 한 번씩 42㎞를 달리는 ‘주간 마라톤’은 5개월 동안의 연수기간 내내 이어진다. 전 세계에서 온 임원들은 연수원에 캠프파이어를 마련해 놓고 테이블 별로 무대에 나가 그룹 부회장 앞에서 술잔을 들고 다짐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행사는 한밤 중의 추위에도 몇 시간이나 계속된다. LG전자 프랑스 법인장을 지낸 프랑스인 에리크 쉬르데주가 저서 ‘한국인은 미쳤다!’(2015)에서 파헤친 한국 기업문화의 어두운 단면이다.

▦ 그 후에도 우리 기업의 상명하복식 군대문화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으로 현대차 글로벌홍보 담당 상무를 지낸 프랭크 에이렌스가 최근 낸 책에도 그의 눈에 비친 기이한 풍경들이 소개돼 있다. ‘푸상무(프랭크+상무)’라고 불렸던 그는 3차까지 이어지며 폭탄주를 강권하는 회식문화에 경악했다. 단합대회 명목의 토요일 산행은 악몽과도 같았고, 상사가 “내일 하루 쉬지”라고 하면 “아닙니다”를 세 번은 복창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 피임약까지 동원한 KB국민은행의 행군 프로그램을 계기로 기업의 군대식 조직문화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무박 2일 행군, 강압적 단체 등산, 해병대 캠프 등 신입사원 연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맹목적 충성, 지나친 경쟁문화, 비효율적인 장시간 근무 등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가 여전하다. 특히 KB국민은행 사례처럼 출산과 육아와 관련돼 있는 여성의 경우 폭력적 문화의 피해자가 되기 쉽다. 상사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알렸는데도 회사가 덮으려 했던 한샘 성폭행 논란도 수직적 조직문화의 그림자다.

▦ 박정희 시대의 산물인 기업의 군대식 문화는 압축성장에 일정 역할을 했다. 하지만 창의성과 자발성이 강조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경쟁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지난해 삼성 갤럭시노트7 생산 중단 사태가 빚어지자 뉴욕타임스는 “고위직들의 명령이 내려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군대문화가 사태를 초래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 같은 거대 소프트웨어 기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창조와 혁신의 조직문화가 바탕이 됐다. 한국의 기업문화 시계는 여전히 과거에 멈춰 서 있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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