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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와 알링턴은 하나다

입력
2016.03.2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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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골목길 신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극단 골목길 신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박근형이 쓰고 연출한 극단 골목길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남산예술센터 27일까지)는 전쟁이 주제다. 크고 작은 영웅이 유장하고 비장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쟁서사는 관객이 몰입하기 좋은 주제지만 낭만화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을 우려한 작가는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네 가지 사건을 교차 편집하는 것으로 이화 효과를 구축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대한민국 육군 탈영병의 애환(2013), 일본제국의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이 된 조선인 병사의 사연(1945), 이라크 팔루자에서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한국인 미군 물품 납품 업체 사원의 비극(2004),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초계함 생존자의 증언(2010)을 한 자리에서 듣고 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삽화적 구성은 관객을 분석적으로 만들지만, 이화 효과가 지나치면 관객과 무대가 서로 겉돈다. 다행히도 네 가지 에피소드가 내장한 높은 인화성(引火性)과 배우들의 열연이 1시간 40분 동안 관객의 주의를 잠시도 놓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탈영병은 헌병을 기다리면서 말상대가 되어준 여자 노숙자에게 “우린 모두 전쟁 중이고, 우린 모두 군인”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하나로 묶어주면서, 작가가 발표했던 기왕의 작품과 이번 작품을 통째 연결해 준다. 박근형의 모든 작품은 그렇게 말해왔던 것이다. 우린 모두 전쟁 중이고, 우린 모두 군인이라고! 전역을 한 달 앞두고 탈영을 한 말년 병장의 자살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이지만, 졸업을 미루면서 대학에 계속 머물려는 ‘캠퍼스 모라토리엄(Campus Moratoriumㆍ졸업유예)’족의 심리와 상통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서정주가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 伍長 頌歌)’에서 예찬했던 조선인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이다. 천황을 위해 자진해서 생명을 바치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기를 원했던 16명의 조선인 청년 엘리트의 각오 속에는, 그들이 희생한 만큼 자신의 가족과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차별 받지 않고 살게 되리라는 비극적인 염원이 있었다. 마사키(박동철)의 어머니는 죽으러 가는 아들을 부여잡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팔자구나!”라고 절규하는데, 이런 상황은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나오는 등장인물 전체에 해당한다.

극단 골목길 신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극단 골목길 신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세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이라크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기 전날, 애인에게 “이 오빤 절대 비 안 맞아!”라고 말한다. 박근형에게 비는 죽음을 뜻하는 바,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서동철 역시 장담했던 ‘비’를 피하지는 못한다. 결혼자금을 벌기 위해 미군 군납 업체의 직원이 된 그는 프랑스 철학자 에릭 코바가 말한 것처럼 “지역 열강들이 자국의 특수 이익을 위해 지역 갈등에 눈독을 들이는 일반적인 양상”의 희생자다. 서동철을 죽인 이라크인들을 테러리스트로 단순화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모두 죽는다. 특히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관객은 수병의 떼죽음을 보게 되지만, 생존 수병 한 명(안 이병)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보았습니다. 그 날 나는 죽은 자들의 곁에서 다 보았습니다”라고 오열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다 보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 작가가 이 에피소드 속에서 한 번도 초계함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격침이냐, 좌초냐?’라는 판단이 아니라, 그 사건을 현재진행형의 의문으로 남겨두기 위해서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초계함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옳게 파악한 것도, 작가의 고민에 걸 맞는 예의도 아니다.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은 하나같이 “야스쿠니 신사에 묻어 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고, 네 번째 에피소드(초계함)는 떼죽음을 당한 수병에 대한 서훈이 벌어지는 대전 국립 현충원에서 끝난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의 야스쿠니와 한국의 현충원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국가는 전사자 유족의 불만을 진정시키고 그 불만이 국가를 향해 터지는 일이 없게 하려는 목적으로 전몰장병을 위한 국립 추도시설과 국가 기념일을 만든다. 이런 ‘국가적 의례’를 거침에 따라 유족의 슬픔은 진정되고, 이런 의례 끝에 국가는 자국의 전쟁을 ‘정의의 전쟁’이라 칭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의 사상사 연구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국가가 군대를 갖고 있는 한 전쟁은 피할 수 없고,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야스쿠니는 계속 만들어 질 것이라고 말한다. 전사한 미군을 안장하는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야스쿠니 신사는 다를 게 없다.

극단 골목길 신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극단 골목길 신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청춘예찬’에서부터 ‘너무 놀라지 마라’에 이르기까지, 박근형은 줄기차게 무너져가는 가족을 형상화했다. 그것이 너무 성공적이었던 때문에, 그의 작품에 숨은 그림처럼 어른거리는 전쟁의 풍경은 간과되었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뒤늦게 알려준 비밀은, ‘콩가루 집안 이야기’로 일관되었던 그의 작품에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의 기억은 물론이고 군인과 군대가 끊이지 않고 언급되어왔다는 것이다. 뿌리 뽑힌 난민처럼 ‘장소(場所) 상실’을 겪고 있는 박근형의 등장인물들이 자주 애용하는 다방 노래방 숙박업소 술집 등은 대표적인 ‘비(非)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은 박근형의 작품을 전쟁이나 전후 풍경과 연관하여 해석해 볼 것을 주문한다. 그의 지문이 되어버린 중혼과 근친상간 등의 일탈된 도덕규범과 성규범은 그의 의식을 투과한 뒤 변용된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전후 풍경이 아닌가? 1963년생인 작가가 전쟁을 체험했을 리는 없지만, 월남한 실향민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의 이력은 그가 부모로부터 전쟁의 트라우마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지난해 문화예술위원회가 제작 지원을 하는 우수 공연작품으로 선정되었으나, 외압 끝에 작가 스스로가 선정을 반려했다. 이창동 감독의 ‘시’가 2009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에서 석연치 않은 탈락을 당하고서도 이듬해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것처럼, 관객들은 남산예술센터의 좌석을 연일 매진시키는 것으로 이 작품을 성원하고 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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