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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김정은의 선택, '박정희 혹은 박근혜'

입력
2015.02.1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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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배달되는 한국일보에는 ‘블론디’ 만화가 게재된다. 번역을 책임진 한국일보 국제부가 미국 영어 특유의 풍자ㆍ비유를 놓치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 데에는 외국계 은행 임원을 지낸 최동인씨의 도움말이 절대적이다. 은퇴 후에도 영어 공부가 취미인 그는 미국 상류사회의 고급 영어는 물론이고 시사ㆍ속어까지 정통하다.

한국일보와 최씨 집안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큰 형님인 고 최규장씨는 1960년대 독도 수비대 특종 등 본보 사회면을 빛낸 언론인이다. 60년대 중반 타 언론사로 이직한 뒤에는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고 최규장씨는 79년 ‘10.26 사태’ 전후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3명의 대통령을 보좌한 청와대 정무 비서관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서전 ‘언론인의 사계’에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임명한 마지막 청와대 비서관이요, 전두환 대통령에게 사표를 낸 첫 번째 정무 비서관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그 사이에 과객(過客)처럼 지나갔다”고 적고 있다.

외교 담당 정무 비서관이었던 만큼, 그의 자서전에는 70년대 격동의 한미 관계 비사가 상세히 담겨 있다. 박동선 로비 사건의 전개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미 의회 증언을 막기 위한 박정희 정권과 김형욱의 최종 담판도 설명하고 있다. 최후의 비밀특사로 당시 김종필 전 총리가 캘리포니아를 방문, 김형욱과 페블비치 골프장에서 만났다는 내용이다.

틈틈이 이 책을 읽다 보니 북한 김정은 정권이 ‘핵ㆍ경제 병진노선’으로 미국과 맞서는 요즘 형국이 40년전 박정희 정권과 너무 흡사하다는 걸 발견하게 됐다.

우선 미국의 대북 압박. 유엔에서 미국 주도로 ‘인권결의안’이 통과된 것처럼 70년대 미국 카터 정권은 ‘인권’을 무기로 박정희 정권을 몰아 붙였다. 치외법권인 외교행낭이 공항에서 검색 당하는가 하면 주미 대사가 미행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사관에 근무하던 한국 외교관 두 명이 미국에 망명했고, 미국 언론의 한국 때리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영화 ‘인터뷰’로 궁지에 몰린 지금의 김정은 정권과 비슷했다.

‘언론인의 사계’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방위산업 육성과 비장의 핵개발 의지로 맞섰다. 프랑스에서 도입하려던 핵 재처리 시설이 미국 압력으로 무산되자 ‘화학 처리 대체 사업’으로 이름을 바꾸는 방식으로 핵개발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중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에도 성공했다. 자주 국방의 의지가 담긴 병기창(창원기계 공업기지)을 미국의 국방ㆍ안보 관계자들에게 공개하는 강수(强手)도 뒀다. 78년 가을 이곳을 찾은 헤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 일행은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연발했고, 이듬해 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 백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 전 대통령과 김정은 정권의 유사성을 비교하다 보면, 자연스레 ‘10.26 사태’를 북한 정권의 예상 가능한 운명으로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집권 3년차를 넘기면서 김정은 정권은 내심 자신감을 갖는 분위기다. 양호한 기상 여건으로 3년 연속 흉년이 들지 않고, 군에 집중됐던 자원의 일부를 민간 부문으로 돌리면서 주민 생활수준이 개선되는 등 ‘병진노선’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유신정권 말기인 78년에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9.3%에 달했다. 역사가 늘 반복되는 건 아니지만, 79년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어이 없는 방식으로 유신정권이 무너졌던 사례가 북한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게 워싱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015년은 북한의 추가 핵실험 가능성과 한미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 등 한반도 안보 정세의 복잡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지난 역사는 김정은 정권에게 ‘박정희의 길’이 아니라, 핵을 포기하고 ‘병진’이 아닌 ‘단일노선’으로 바꾸기를 촉구하는 ‘박근혜의 길’을 요구하고 있다.

조철환 워싱턴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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