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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너 없는 평화

입력
2016.04.0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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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벌써 꽃들이 피기 시작했잖아. 가로등 불빛 아래 창백하게 그늘진 매화를 바라보며 친구는 투덜거린다. 아까부터 흘려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이해하게 된다. 준비도 덜 됐는데 기별 없이 활짝 피어나는 꽃들이라니. 저 멀리 언덕 아래에서 또 다른 친구가 걸어올라 오는 것이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비닐 봉투 속에는 아이스크림과 생수가 들어 있다.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맞이하기 바랐던 기대를 저버린 꽃들에게 복수하듯, 우리는 함부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고 생수를 벌컥벌컥 마셔버린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여전히 불빛이 환한 도시를 내려다본다.

아. 공기가 너무 나빠. 미세먼지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서울타워의 불빛이 미세먼지 농도를 알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한 친구의 말에 모두들 놀란다. 파란색 조명은 서울 공기가 제주도처럼 맑다는 의미야. 연두색이나 붉은색은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가라는 신호이고. 우리는 일제히 소리친다. 이제까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왁자지껄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한밤중에 이토록 높은 곳에 올랐으므로 저 아래 잠 들어 있는 너희들을 향해 불만을 터뜨릴 자격이 있다는 듯이. 내 신발을 조롱하고, 내 외투를 조롱하고, 내 나이를 조롱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관심이 있으면서도 관심이 없다고 하고,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싫어한다고 하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빵집을 하려고 했더니 베이커리를 하자고 하고, 카페를 하려고 했더니 커피 전문점을 하자고 했어. 구멍가게 옆에 냉큼 편의점을 차릴 것들이야. 땅도 많고 집도 많으면서, 자기 땅을 조금 침범했다고, 남의 집 현관과 창문을 거대한 벽으로 막아버리는 것들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너희들의 너무 끔찍한 그럴 수 없음에 한숨을 쉬면서 우리는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본다. 너희들은 저렇게 많은 별들을 갖고 있구나. 불을 밝힌 채 잠들어 버린 너희들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어.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입을 다문다. 잠시 너 없는 평화가 깃든다. 너희들을 쏟아버리고 나니 예상과 달리 당황스럽기도 하고 허전한 것 같기도 하다. 라면이나 먹으러 갈까? 치킨은 어때? 아무래도 국물이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우리는 검은 비닐 봉투에 아이스크림 껍질과 빈 생수통들을 주섬주섬 담는다. 바로 요 밑에 있는 공원에 쓰레기통이 있어. 우리는 문화시민이니까. 친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누가 이렇게 매화나무를 많이 심었지? 푸릇한 꽃향기와 불편한 평화를 산 위에 남겨두고 우리는 밤거리를 향해 내려간다. 오솔길을 벗어나 집들이 좁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골목으로 접어든다.

골목 어귀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린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청년이 이불을 털고 있다. 이거 드실래요? 하나가 남아서요. 친구가 봉투에 남아있던 아이스크림을 꺼내 불쑥 내민다. 뜻밖에도 청년은 해맑게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다. 고맙습니다. 살짝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진다. 단정하고 착하게 생겼잖아. 모두들 고개를 돌려 청년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나온다. 집과 집 사이의 간격도 넓어졌다. 저거 가져갈까? 전봇대 옆 담벼락에 낡은 서랍장과 거울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거울은 쓸 만해 보이는데. 안 돼, 안 돼.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왔던 친구가 손사래를 친다. 남이 버린 거울은 집안에 들이는 게 아니야.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가져가면 안 될 것 같아. 무엇인가가 따라와 거울을 볼 때마다 나타나면 어떡해. 이를 테면 ‘너희들’이나 ‘너 없는 평화’ 같은 것. 거울을 그냥 지나친다. 우리는 24시간 문을 여는 분식집을 향해 걸어간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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