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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무산된 ‘7성급 한옥호텔’

입력
2015.08.2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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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보건법의 ‘정화구역’이란 대못

상식의 장도리로 못 뺄 리 없었지만

재벌 혐오와 ‘시샘’의 벽 넘지 못해

문화체육관광부가 18일 ‘국정 2기, 문화융성의 방향과 추진계획’을 밝혔다. 경복궁 옆 옛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땅에 복합문화공간을 만든다는 계획에 맨 먼저 눈이 갔다. ‘K 익스피리언스(Experience)’라는 가칭에서 한국 전통문화 체험 공간일 것임은 짐작이 갔다. 그럼 어떤 형태의 공간이, 어떤 내용이 담길지에 관심이 가야겠지만 그보다는 땅 주인인 대한항공의 ‘7성급 한옥호텔’ 계획이 불발했다는 데 생각이 묶였다.

‘송현동 땅’이라고 불리는 그 땅에 얽힌 추억 때문이다. 꼭 30년 전 봄에 입사한 한국일보의 중학동 사옥이 바로 그 땅의 남쪽 길 건너에 있었다. 고(故) 김수근씨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13층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꼭대기 층 ‘송현 클럽’에서 내려다 보는 북쪽은 사철 절경이었다. 멀리로 북한산 연봉이 보이고, 인왕산과 마주한 북악(北岳) 아래로 청와대와 경복궁이 미끄러지듯 정겹게 앉았다.

눈을 아래로 돌리면 바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였다. 서울 도심에서는 보기 드물게 무성한 녹지에 작은 아스팔트길이 나 있고, 그 사이에 드문드문 2층 타운하우스가 서 있었다. 단지 안에는 플라타너스와 신갈나무, 단풍나무가 어울려 자라고, 마당에는 농구 골대와 테니스장이 마련돼 있었다. 나중에 꼭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주거형태였다.

지금도 10여 년 전에 찍은 사진파일을 열어 추억에 잠길 정도로 의미가 특별한 그 땅에 처음 미술관이 지어질 것이라고 해서 “잘 됐다”고 무릎을 쳤다. 나중에 삼성생명에서 대한항공으로 넘어간 그 땅에 7성급 한옥호텔 건설이 추진된다는 소식도 반가웠다. 둘 다 주변경관을 해치지 않고, ‘송현동 땅’을 한결 빛나게 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은, 인연이 각별한 인간만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당장 자치체를 비롯한 행정이 발목잡기에 나선 것은 물론이고 시민단체의 적극적 반발에 이끌린 듯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결정적 걸림돌은 그 땅과 붙은 풍문여고와 덕성여고, 덕성여중이었다. 학교보건법 제5조는 학교 경계에서 200fm 이내의 ‘정화구역’을 두도록 했고, 제6조는 다른 혐오ㆍ유해 시설과 함께 ‘호텔, 여관, 여인숙’(제13호)을 여기에 둘 수 없게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겉모습이다. 동법 6조의 단서조항은 대통령령이 정한 범위(학교 경계와 50fm 이상 떨어진 곳)에서는 위험물저장소 등과 함께 호텔도 학교환경위생정화위원회 심의를 거쳐, 교육감이나 교육감이 위임한 자가 괜찮다고 하면 지을 수 있게 했다. 단서조항과 시행령의 이런 융통성도 법과 그 해석의 경직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호텔을 ‘유해시설’의 하나로 규정한 입법자의 발상이 케케묵었다. 도심 유흥가에 차량 번호판을 가리려는 요상한 비닐 천막을 드리운 ‘러브호텔’이 아니다. 멋진 정원과 산책 공간, 고급 식당 등을 갖춘 최신의 문화공간인 특급호텔을, 그것도 주위 경관과 조화로운 저층의 한옥호텔을, 아직도 남녀가 손잡고 나오면 이상한 눈길이 가게 마련인 모텔이나 여인숙과 어떻게 같이 볼까. 초특급 호텔의 일반적 조경 방식에 따른다면 문제가 된 ‘정화구역’은 정원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컸다. 호텔의 경계를 있지도 않거나 있더라도 높이가 낮고 군데군데 열려있을 담이 아니라 건물 외벽을 기준으로 삼기만 해도 ‘행정 규제’는 벗겨줄 수 있었다.

그러나 법규의 적극적 활용, 즉 법규가 제공한 규제의 최대 실현을 권한 유지의 최고 수단으로 여기는 행정의 활약은 컸다. 대한항공은 대법원까지 끌고 간 행정소송에서 졌다. 그리고는 아예 법의 위헌성을 따지는 헌법소원에 나섰다가 취하했다. 그 사이 핵심 사업담당자였던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이 터졌다. 재벌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려던 대중의 재벌 혐오와 집단적 시샘을 폭발시키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그 격랑은 대한항공의 오랜 꿈을 안개처럼 흩뜨렸다.

앞으로 ‘K익스피리언스’가 성공하더라도, 행정규제와 대중적 질시라는 대한항공의 악몽은 오래 갈 게 뻔하다. 멋진 한옥호텔을 ‘내 마음의 고향’에 두지 못한 개인적 실망도 마찬가지다.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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