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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오! 낙원

입력
2017.12.07 11:4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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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의 균형은 노동시간 단축이나 유연근무제와 같은 제도적 기획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출퇴근의 일상만 봐도 그렇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통근시간을 조정한들, 집과 회사를 오가는 데 드는 시간이 과하면 일과 삶은 갈등하기 마련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은 하루 평균 101.1분이고 서울에 사는 이는 2시간이 넘는다(본보 7월 17일). 돈으로 치면 한 달에 94만원이고(한국교통연구원) 피로를 누적시켜 생산성을 해친다. 우울감을 높여 수명까지 단축시킨다니 경제협력개발기구가 일찌감치 통근시간을 삶의 질 측정지표로 삼은 것은 매우 타당하다.

일과 삶의 조화를 위한 ‘장소적’ 기획이 필요하다. 이 프로젝트는 일터와 삶터의 인접성을 달성할 공간적 해법은 물론, 관계와 의미, 삶의 에너지를 재생산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새로운 지향과 구상을 담아야 한다. 건축가 황두진이 내놓은 상가아파트 탐사물은 이 점에서 많은 보탬이 된다(‘가장 도시적인 삶’ㆍ반비). 상가와 아파트가 결합된 고밀도 복합건물을 성실히 답사한 그는 이 양식에서 ‘직주근접(職住近接)’의 원칙과 활력 있는 삶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솜씨 있게 뽑아냈다. 특히 그가 주목한 낙원빌딩은 지극히 벤야민적인 소재다. “작은 개별적 계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체 사건의 결정체를 찾아내는 방식”이 벤야민의 접근이라면(철학자 아도르노), 낙원빌딩은 일-삶 양립을 위한 기획의 원칙과 실천양식을 탐색하는 데 풍부한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낙원상가로 익숙한 이 빌딩은 낙원아파트와 낙원시장, 영화관과 야외광장을 한 공간에 구현한 고도의 복합건축물이다. 시내 직장 대부분은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한 데다 실제로 주민 대부분이 건물 안이나 인근에서 일하고 있다 하니 직주근접의 전범으로 제격이다. 영화관과 공연장을 아우름으로써 직(職)과 주(住)에 문화를 인접시켜 참살이(well-being)를 더했다. 직주근접의 ‘장소’가 주상복합의 ‘공간’보다 우월한 이유는 의미와 추억을 창출하는 데 있다. 낙원시장은 인정과 관계를 주고받는 장소이니 상품 거래 공간인 마트를 넘어서고, 대를 이어 명품을 짓는 작품소라 할 만한 악기상가는 제품 제작소를 능가한다.

한국 근대의 추억도 이곳에 오롯하다. 가난한 시절, 도시적 삶을 꿈꾸고 당시로선 획기적인 건축양식을 설계했다. 부실공사 관행과 대결하며 어리석으리만치 성실하게도 지어냈다. 입구에 전시된 콘크리트 코어천공을 보니 우당(愚堂)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낙원빌딩은 한국적 모더니즘의 기억을 자신의 몸에 새겨 놓았나 보다. 아직도 ‘대한 늬우스’가 방영될 법한 영화관이 있는, 이 서울 미래유산의 이름은 그래서 ‘낙원삘딍’이다. 낙원아파트 중정 벽에 장식된 거대한 부조도 의미가 남다르다. 1969년 완공 당시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것이라 하니 놀랍기만 하다. 그가 새겨 넣은 나팔 부는 님프는 소박한 성취의 꿈을 담은 것일 게다. 샘과 나무숲, 새와 닭이 평온해 뵈고 갓난애를 안고 있는 여인의 젖이 풍성하다. 일과 삶의 조화가 완성된 장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너무 유토피아적일까.

최근 자치단체마다 도시재생사업이 한창이다. 일과 삶의 조화를 이뤄 내고 도시의 활력을 더해야 할 사업이 외려 원주민을 몰아내고 있다니 우려된다. 경계해야 하거니와 “기존 상인들이 쫓겨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남아 개발의 한 축을 담당”(황두진)하게 한 낙원빌딩 건축사(史)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해법으로 충분하다. 얼마 전 국회의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불발로 끝났다. 제도개선도 지지부진한 현실에서 새로운 도시생태적 기획은 먼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존중사회의 일상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제도개선과 함께 낙원에 담긴 계기를 현대적으로 구현할 통 큰 기획을 서둘러야 한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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