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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고맙다 박근혜

입력
2017.11.23 11:3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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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남았다. 불의한 박근혜 정권을 촛불 시민이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 하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명박 정부가 군과 국정원을 동원해 자행한 불법적인 선거개입이 없었다면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박근혜 후보가 아닌 문재인 후보였을지도 모른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우리는 박근혜 정부의 불의한 국정농단에 치를 떨 이유도,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연인원 천만이 넘는 시민이 차가운 광장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외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면 우리는 다가올 2017년 12월 20일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개발독재의 신화에 가려진 국정농단의 주범 박근혜를 대통령 당선자로 대면했을지도 모른다. 박원순, 안희정, 이재명 등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들이 박근혜 후보와 경쟁했겠지만, 박정희 신화를 무너뜨리고 승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012년 12월 정권교체로 수립된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국민의 삶이 확연하게 나아지고, 개발독재 시기처럼 높은 성장이라는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발독재 시대의 향수에 젖은 국민은 실현 불가능한 고도성장을 기대하며 다시 박정희를 호명하고, 박근혜는 그 호명에 부응해 화려하게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월호 유족과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고통 받았던 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 “차라리 잘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JTBC의 보도로 촉발된 국정농단 사건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사회를 짓눌렀던 불의한 신화들이 깨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마음속 깊이 신앙처럼 남아있던 박정희 개발독재의 신화는 박정희의 비판자가 아닌 그 신화의 계승자였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딸이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는’ 믿을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박근혜로 인해 한국인은 비로소 박정희 개발독재의 신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등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신화 또한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는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라는 불가역적인 길로 들어섰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보수 정부 9년 동안 자행된 민주주의와 인권 유린은 과거 권위주의 체제를 방불케 했다. 박근혜 정권을 우리의 힘으로 무너뜨리면서 우리는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없이는 지켜지지도, 발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화가 된 시장 만능주의도 박근혜 정권과 함께 붕괴했다. 민주주의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시장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박근혜 정권은 깨닫게 해주었다. 신자유주의 20년 동안 ‘돈 많은 부모를 만난 것이 실력’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헬 조선이 되어갔기 때문이다.

안보와 경제를 생각하는 능력 있는 보수라는 신화도 박근혜의 탄핵을 계기로 산산이 부서졌다. 공동체의 안위보다 자신의 이해에 따라 이합 집산하는 부도덕한 기성 보수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분간 한국 사회에서 보수가 국민의 신임을 받는 일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보수의 무능과 부패가 드러났다.

고맙다 박근혜. 이 모든 일이 당신의 부도덕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우리는 불의한 족속들이 다시는 반공과 애국의 탈을 쓰고 한국 사회를 짓밟을 수 없도록 정의로운 보수와 진보가 함께 춤추는 튼튼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한 달 남은 ‘12월 20일’이 촛불 시민의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의 임시공휴일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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