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기자

등록 : 2018.03.15 20:13

[논ㆍ담] “여성을 피하는 펜스룰은 스스로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인정하는 셈”

‘미투’ 피해자 보듬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

등록 : 2018.03.15 20:13

‘폭행ㆍ협박이 있어야 강간죄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

형법 조항이 고발 위축시켜

강당에 모여… 온라인 통해…

성폭력 예방교육 실효 없어

유치원부터 타인존중 배워야

미투 의미 살려나기기 위해선

각자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2차 가해에 처벌 뒤따라야

이미경 소장은 15일 “과거 운 나쁜 개인의 일로 치부해 쉬쉬하던 성폭력 문제를 모든 사람이 함께 고민하는 시대가 된 게 감격스럽다”며 “우리 사회가 한 단계 탈바꿈할 이런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뒤에 걸린 그림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03년부터 매년 열고 있는 ‘생존자말하기대회’ 포스터다. 피해자들이 사례 소개나 춤, 노래 등 다양한 형태로 청중과 피해를 공유하는 집단 ‘미투’이자 ‘위드유’ 이벤트다. 홍인기 기자 ikhong@hankookilbo.com

“지금 ‘미투’ 물결이 마치 혁명처럼 느껴진다. 사회 변화는 결코 뒷걸음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이미경(58)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15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성폭력 문제는 오랫동안 쌓인 작은 노력이 몇몇 용기 있는 분들의 고발로 확산돼 마치 봇물 터진 기세로 사회적 과제가 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던 이 소장이 다른 여성학자ㆍ활동가들과 함께 국내 처음으로 성폭력상담소를 개설한 것은 1991년이다. “가부장적인 전통 규범이 만들어낸 정조 이데올로기, 성이중성 등 남녀 불평등사회를 배경으로 성폭력이 재생산된다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변화를 실천해보자고 58명이 모여 각자 10만원씩 내 서울 서초동에 7.5평 오피스텔에서 상담소를 열었다.”

개설 당시 과연 상담전화가 올까 반신반의했던 것과는 달리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걸려오는 전화가 적지 않았다. 초기 상담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할머니의 ‘미투’였다. “30년 전 일이라며 옛날에 당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렇게 누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 짐을 한결 더는 것 같다며 우시더라고요.” 후원의 손길에 힘입어 2000년대 초에 건물을 신축해 성산중학교 옆으로 옮긴 상담소에 지난해까지 모인 상담사례는 8만1,866건. 그 하나하나가 바로 ‘미투’다. “미투 자체가 새롭다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이 소장에게서 앞으로 미투 운동의 과제에 대해 들었다.

-오래 전 일을 왜 이제 와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피해자들이 뒤늦게나마, 누군가의 용기 있는 고발에 힘을 얻어 자신의 피해를 말하는 심정은 어떤 것인가.

“아무리 오래된 일이더라도 피해자들은 그 일을 하루도 잊지 못하고 산다. 피해의 기억은 세월에 바래지도 않아 매일 돌덩이처럼 가슴을 내려 누른다. 그런데도 가해자는 너무나 떳떳하게 승승장구한다. 피해자들은 나에게서 하루도 고통이 떠나지 않는데 가해자들은 아무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이 불합리함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처구니 없는 이런 상황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절박함이 미투 고발자들에게 있다. 다른 사람이 똑 같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연대의식도 적지 않다. 미투에 많은 사람이 호응하는 것도 그런 연대의식에 감응하는 것이다.”

-상담 사례로 볼 때 성폭력은 주로 어떤 연령,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 발생하나.

“모든 연령에서 너무나 다양한 유형으로 일어난다. 가해자는 어느 직종 어느 직책 어느 분야라고 할 것이 없다. 정말 사회 전체에서, 누구도 믿기 힘들 정도로 일어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이 정도로 인권이 바닥인 사회인가 하고 몸서리 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담통계를 보면 피해자는 유아부터 할머니까지 전연령층의 여성이다. 남성 피해도 5%는 된다.”

이미경(오른쪽) 소장이 15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 1층에서 최근 미투 물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ikhong@hankookilbo.com

-미투 고발을 위축시키는 법제 등의 문제는 없나.

“최근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에서 한국 형법상 강간죄 구성요건에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문제 삼았다. CEDAW는 일반권고 35호로 강간을 포함한 모든 성범죄를 개인의 안전과 신체적, 성적ㆍ정신적 온전성에 대한 침해로 규정하면서 자율적인 동의 여부를 성범죄로 정의하는데 이런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형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피해자는 물론이고 그들을 돕는 단체 등 지원자도 소송 대상이 된다. ‘위법성 조각사유’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보통 2, 3년 걸린다. 가해자가 무고를 호소하면 그게 먼저 재판으로 진행돼 피해자는 또 상처를 받고 대항할 힘마저 잃게 된다.”

CEDAW는 유엔인권이사회의 전문가 조직이다. 1981년 여성차별철폐협약을 발효했고 한국정부는 1984년 이를 비준했다. 이후 최근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여성차별철폐 노력 관련 정부보고서를 내 심의를 받았는데 지난달 8차 심의 이후 CEDAW가 보내온 최종 견해 중 ‘여성에 대한 성폭력’ 항목에서 7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①형법상 강간죄가 되기 위해 폭력과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과 부부강간죄 법제화 미비 ②가정폭력 관련법이 가해자 처벌보다 가정 회복을 우선으로 하는 문제 ③피해자가 원인제공자라는 사회적인 낙인과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과거 성 이력을 사법 판단에 포함시키는 문제 ④온라인 성범죄 증가와 부실한 기소ㆍ처벌 ⑤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느슨한 단속과 처벌 ⑥학교 군대 등 공공기관의 성폭력 풍조 ⑦피해자들에 대한 상담, 심리치료, 쉼터 제공 부족 등이다.

-정부가 최근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ㆍ성폭력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여러 부처가 분야별로 다양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대책들을 아울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성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규정이 부족하다. 사실 이 개념은 성폭력특별법에도 빠져 있다. 성폭력이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개념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성희롱ㆍ성폭력 홍보나 교육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대형강당에 모아 놓고 또는 온라인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는 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누굴 대상으로 할지도 세분해야 하고, 40명 미만의 토론 교육으로 방식도 바꿔야 한다. 정부 대책은 발표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잘 이행되는지 살피고 부실한 부분을 보완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미투 고발자들은 2차 가해로 또 어려움을 겪는다.

“주로 온라인상에서 오가는 2차 가해는 근본적으로 시민들이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져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2차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최근 2차 가해를 막아달라고 호소한 김지은씨를 대리해 가해자들을 고발하고 허위사실 유포를 중지시켜주도록 사법 당국에 요구할 계획이다. 가해자나 피해자가 유명인이거나 한 경우는 다행히도 이런 2차 가해에까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만 주목 받지 못한 상태로 2차 가해의 타깃이 되는 피해자들도 허다하다. 덜 알려진 피해자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하다.

이 소장은 2012년 ‘성폭력 2차 피해를 통해 본 피해자 권리’라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2차 피해 사례를 크게 6가지로 분류했다.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화간 의심’ ‘무시, 무성의, 불친절, 부정적 견해’ ‘합의 강요’ ‘사생활 침해, 신변 위협’ ‘절차고지 안내 부족’ ‘반복 진술, 신뢰관계인 동석 거부, 무고 위협’ 등이다. 그는 특히 피해자 수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2차 피해에 주목해 사법 당국의 수사 과정은 물론이고 이로 인한 갈등으로 손해배상소송이 벌어지는 경우에도 ‘피해자 관점’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미경 소장이 15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 1층에서 최근 미투 물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미투가 공작에 이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 논란이 되고 있다.

“공작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나 하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낀다. 미투 참여자의 절박함 결연함에 공감하지 못하는 행태다. 피해자들은 누군가를 죽이려는 것도 망치려는 것도 아니다. 가해자가 권력을 이용해 더 이상 그런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것이고 내 고통이 멈추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인권을 보호해달라는 목소리를 깎아 내리고 비난하는 이런 행태는 심각한 2차 가해이다.”

-미투 물결 이후 아예 여성과 접촉을 꺼리는 풍조도 생겼다는데.

“전에 여성학 강의를 듣던 한 남학생이 성폭력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남성 일반을 언제나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하더라. 그럴 수 있다. 성희롱ㆍ성폭력을 피한답시고 여성을 꺼리는 남성은 스스로를 그런 잠재적 가해자로 낮추는 것과 뭐가 다른가. 남성이 스스로를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남을 존중할 줄 안다면 여성을 꺼릴 이유가 없다. 여직원은 여성이기 이전에 직원이다.”

-미투 물결이 지속되려면.

“미투의 의미를 살려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제가 고발자나 가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 각자 자신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누구나가 가해자이거나 피해자 또는 그 주변인으로서 성폭력 문제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실천이 있어야 한다. 미투 사건들이 술자리 안주감에 그쳐서도 안 된다. 지하철 성추행을 목격하고도 눈 딱 감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2차 피해가 없도록 하는 조치도 중요하다. CEDAW도 권고한 것처럼 과거 성 이력을 가지고 피해자를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일을 들어 이번에도 화간일거야 하는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은 수사해서 처벌해야 한다. 성폭력 사건 수사 담당자가 인권감수성을 가져야 한다. 피해자에게서 진술을 받을 때나 가해자와 대질신문, 재판 과정 등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권감수성을 키우는 교육이다. 유치원에서부터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타인을 존중하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성폭력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 경우 피해자 부모들이 항의하면 ‘아이들이 뭘 알고 했겠느냐’며 가해 아이 부모들은 자식을 감싸고 돈다. 피해를 본 아이는 상처가 더 커진다.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치고 행동이 바뀌도록 해야 한다. 결국 이런 부실하고 잘못된 교육이 그 아이가 크도록 이어지는 것이다. 직장 내 사건에서도 피해자의 대응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비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 피해자는 사회를 신뢰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입을 열지 않게 된다. 성폭력 사건은 어떤 특정한 비커 안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이런 우리 사회 성문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어느 영화감독이 촬영 전에 우리 스태프는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성희롱 하지 않습니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벌써 마음가짐부터 달라지지 않겠나. 바로 이런 작은 실천, 다짐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 갈 것이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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